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86> 6월 개막 앞둔 사우디 슈퍼 골프 리그
그레그 노먼. 사진 AP연합
필 미컬슨. 사진 AP연합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일극(一極) 체제로 돌아가던 골프 플랫폼에 도전장을 내민 ‘슈퍼 골프 리그(정식 명칭은 LIV 골프 인비테이셔널 시리즈)’가 마침내 6월 9일 출범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 국부펀드(PIF·Public Investment Fund)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슈퍼 골프 리그의 개막전은 6월 9일부터 사흘 동안 영국 런던 근교 웬트워스의 센추리온 골프클럽에서 열린다. 10월까지 미국(포틀랜드·베드민스터·보스턴·시카고·마이애미), 태국(방콕), 사우디(제다) 등을 돌며 8개 대회를 치를 예정이다. 골프 레전드인 필 미컬슨(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1위인 리 웨스트우드(잉글랜드)와 마르틴 카이머(독일), 2017년 마스터스 우승자인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 로버트 개리거스(미국) 등은 이미 참가 의사를 밝혔다.
슈퍼 골프 리그를 추진해온 LIV 골프 투자(사우디 국부펀드 자금으로 운용하는 투자펀드)의 그레그 노먼(68·호주) CEO는 5월 초 ESPN과 인터뷰에서 “200명 넘는 선수가 6월 첫 대회에 출전 신청을 했다”며 “세계 랭킹 100위 이내 선수가 15명 정도 되고, 세계 랭킹 1위까지 올랐던 선수도 두 명 포함됐다”고 밝혔다.
슈퍼 골프 리그는 대회당 출전 선수 48명, 총상금 2500만달러(약 320억원), 우승 상금 400만달러(약 51억원)의 엄청난 돈 잔치를 벌인다. 컷 탈락 없이 3라운드로 진행되는 대회로, 꼴찌를 해도 12만달러(약 1억5000만원)의 상금을 받을 수 있다. 최종전은 단체전으로, 5000만달러(약 648억원)가 걸려 있다.
슈퍼 골프 리그는 영입 1순위였던 타이거 우즈는 물론이고 세계 10위 이내 선수를 단 한 명도 영입하지 못한 채 출발한다. PGA투어가 영구 제명이란 채찍과 PGA투어 대회의 대규모 상금 증액이란 당근을 내걸고 결사 항전 태세로 나선 게 주효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이 “사실상 무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과 달리 슈퍼 골프 리그는 예정대로 6월 출범하겠다는 의지를 관철했다. 그리고 약 5000억달러(약 648조원)의 운용 규모를 지닌 사우디 국부펀드의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치고 있다.
골프 역사상 가장 큰 ‘전(錢)의 전쟁’에 불을 댕긴 슈퍼 골프 리그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세 명의 남자가 가슴에 품은 속내를 읽어야 한다.
PGA투어 공세에 장기전 선언
이제까지 골프계에 없었던 엄청난 부의 기회 앞에서 미컬슨은 평정심을 잃었다.
다변에 능변인 그는 자신의 슈퍼 골프 리그 참가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PGA투어는 지나치게 탐욕적이다” “나도 끔찍한 사우디와 엮이는 게 싫지만, PGA투어 변화를 위한 지렛대로 삼겠다” 같은 발언으로 역풍을 자초했다. 그런데 가벼웠던 입놀림이 사실은 자신의 탐욕을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
미국의 골프 전문기자 앨런 시프넉은 자신이 쓴 미컬슨의 전기 출간에 앞서 5월 초 요약본을 공개했다. 미컬슨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도박으로 4000만달러(약 510억원)를 잃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미컬슨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전문 도박사 빌리 월터스의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다. 미컬슨은 윌터스로부터 미국 최대 유제품 생산 업체 딘 푸드 주식을 사라는 연락을 받고 주식을 거래해 1주일 만에 93만1000달러(약 12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기업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불법 주식 거래였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수사에 들어가자 불법 주식 거래를 극구 부인하던 미컬슨은 주식 거래 차익과 이자까지 103만달러(약 13억원)를 SEC에 반납해 범죄 혐의에 따른 기소를 면했다. 미컬슨은 슈퍼 골프 리그 참가 조건으로 3000만달러(약 388억원)를 선금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그토록 슈퍼 골프 리그 출범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사실은 도박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미컬슨은 이미 지난 2월 구설에 오른 뒤로 후원 기업이 줄줄이 떠나며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게다가 메이저 6승을 포함해 PGA투어 45승을 거두며 쌓아 올린 골프 전설 이미지마저 퇴색하고 있다.
‘화이트 샤크(백상아리)’란 애칭으로 1980~ 90년대 골프계 스타였던 노먼은 왜 이렇게 슈퍼 골프 리그에 집착하는 걸까. 노먼은 슈퍼 골프 리그를 ‘스타트업’에 빗댄다. “우리는 스타트업이다. 장기 비전이 있고, 성장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1994년 11월 세계 랭킹 1위였던 노먼은 ‘재주는 스타 선수들이 부리고, 돈은 PGA투어나 유러피언투어가 번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업체를 일구는 등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난 그는 월드골프투어(WGT)란 기치 아래 세계 톱 랭커 30~40명이 출전하는 8개의 챔피언십 대회를 구상했다. 현재 슈퍼 골프 리그와 비슷한 형태다.
호주 출신 미디어 재벌인 머독이 운영하는 폭스 네트워크가 독점 중계권료로 1억1200만달러(약 1451억원)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먼이 당시 시도한 스타트업 혁명은 불발탄으로 끝났다. 우즈나 미컬슨 같은 미국 선수는 물론이고 노먼이 공을 들였던 스페인의 세베 바예스테로스와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남아공의 어니 엘스도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PGA투어는 새로운 투어에 가입하려는 선수들에게 ‘PGA투어 출장 정지’란 엄포를 놓고 노먼의 아이디어를 흡수해 세계 톱랭커들이 출전하는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시리즈를 만들었다.
노먼은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스타 선수들 영입이 어려워지자 세계 아마추어 톱 랭커들에게 슈퍼 골프 리그 출전권을 주겠다는 초청장을 보냈다. 대형 유망주들을 ‘입도선매(立稻先賣)’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슈퍼 골프 리그는 한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투자가 필요하다. 자선단체도 아닌 사우디 국부펀드가 무엇 때문에 슈퍼 골프 리그에 돈을 퍼붓는 것일까.
사우디 국부펀드는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사회 의장으로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부왕을 대신해 사실상 사우디를 이끌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산업 중심의 국가 경제 구조를 탈석유화하자는 ‘비전 2030’ 정책을 펴고 있다. 정보기술(IT)과 신재생에너지 등 관련 기업 주식을 사기 위해 약 100억달러(약 12조9600억원)를 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올해 들어 한국의 게임 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며 엔씨소프트 주식과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넥슨 주식을 약 3조원 가깝게 사들였다. 지난해에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의 뉴캐슬을 3억500만파운드(약 4883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선 슈퍼 골프 리그를 사우디의 스포츠 워싱(스포츠를 통한 이미지 세탁) 전략의 하나로 보고 있다. 2018년 사우디 출신의 워싱턴포스트 소속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가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납치돼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평소 왕실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던 그가 살해당하고 나서 유엔 조사단과 미 정보 당국은 빈 살만 왕세자를 배후로 지목했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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