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6승을 거둔 임진희(27)와 5승을 거둔 이소미(26)가 2023년 겨울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 스쿨(Q 스쿨)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이들을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장타를 날리는 선수도 아니고 박성현이나 고진영처럼 KLPGA투어를 압도하던 선수도 아니었다. 이들이 Q 스쿨을 통과해 2024년 LPGA투어에 입성했을 때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위기였다.
연간 30여 개 대회가 열릴 정도로 몸집을 불린 KLPGA투어에서 이들은 연간 상금과 후원 계약을 통해 20억원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는 위치까지 힘겹게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굳이 고생길을 자초하느냐’는 회의와 냉소 섞인 시선이 깔려 있었다.
한국 여자 프로 골프 초심을 보여주는 도전
하지만 이들은 내면이 단단한 선수였다. 임진희는 “약간 모자랄 때가 가장 노력할 수 있을 때다. 세계에서 가장 잘 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이소미는 “조금 느려도 반드시 이루는 게 내 장점이다. 세계 1위 하려고 골프 한다”고 했다.
이렇게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진가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뜨거운 열정과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정신은 세계 골프의 변방이었던 한국 여자 골프를 단기간에 세계 중심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1년 반의 적응 기간을 거치면서 힘겨운 시기가 있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세계 무대를 주름잡던 한국 여자 골프의 초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선수다.
임진희와 이소미는 6월 29일(이하 현지 시각) 2인 1조로 열리는 LPGA투어 다우 챔피언십(총상금 330만달러)에서 고대하던 첫 우승을 나란히 거두었다. 미국 미시간주 미들랜드 컨트리클럽(파70·6096야드)에서 끝난 LPGA투어 다우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8언더를 합작하며 최종 합계 20언더파를 기록, 메건 캉(28·미국)-렉시 톰프슨(30·미국) 팀과 동률을 이룬 뒤 연장 첫 홀서 버디를 잡아 우승했다. 둘은 우승 상금 80만5381달러(약 10억원)를 반씩 나눈 40만2691달러를 받았다. 2년간 LPGA투어 카드도 확보했다.
이번 대회는 포섬(foursome·1·3라운드)과 포볼(four-ball·2·4라운드)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연장전은 팀워크가 특히 중요한 포섬 방식으로 치러졌다. 포섬은 한 팀의 선수 두 명이 공 한 개를 번갈아 가며 치는 방식이다. 한 선수의 실수가 팀 동료 선수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서로 호흡이 잘 맞는 것이 중요하다. 포볼은 두 선수가 각각 자기 공으로 플레이해 더 좋은 스코어를 반영하는 방식. 좋은 성적만 기록으로 인정되므로 한 명은 버디를 노려 공격적으로 경기하는 전략도 가능하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섬처럼 보이는 아일랜드 홀인 18번 홀(파3)에서 이들은 승리했다. 임진희는 제주 출신, 이소미는 완도 출신으로 나란히 ‘섬 소녀’다. 그리고 더 큰 꿈을 향해 기꺼이 물을 건너는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것처럼도 보였다.
지었다. 섬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의미다. 이소미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인 진희 언니와 힘을 합쳤을 때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해 팀 결성을 제안했다. 팀 이름과 팀 노래(빅뱅 뱅뱅뱅) 등 모든 것을 내가 정할 테니 진희 언니에게는 연습에만 집중해달라고 부탁했다”며 웃었다. 이들은 대회 내내 샷이 잘되면 서로 엄지를 추켜세웠고, 실수하면 꼭 안아주고 격려했다. 연장전에서 LPGA투어 11승(메이저 1승) 경력의 톰프슨이 티샷을 홀 1.5m에 붙였을 때도 이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임진희가 2.4m 버디 퍼트를 넣자 긴장한 캄이 짧은 퍼트를 놓쳤다.
임진희와 이소미는 서로를 믿었다고 했다. 임진희는 “연장전에서 톰프슨이 티샷을 홀에 가까이 붙였는데도 이소미는 신경 쓰지 않고 샷을 하더라”며 “그걸 보고 나도 똑같이 ‘그냥’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소미는 “사실 조금 긴장했는데 임진희가 긴장하지 않고 즐기는 듯 보여 믿고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도전 정신, 뚝심’ 회복하는 신호탄
국내 선수에게 LPGA투어는 예전처럼 풍요로운 땅이 아닐 수 있다. 이동 거리가 길어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운 데다 투어 경비가 국내의 대여섯 배가 든다. 세계 각국의 유망주가 몰려들면서 경쟁도 훨씬 치열해졌다.
국내 기업은 우승을 거두지 못하면 TV 중계 화면에도 잘 잡히지 않는 이들보다는 KLPGA투어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에게 쏠렸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지만 LPGA투어에 진출하는 한국 선수의 숫자는 2020년 이후 한 명에서 두세 명에 불과하다. 1년에 LPGA투어의 절반 가까운 15승을 거두던 한국 여자 골프는 최근 한 해 서너 번 우승하기도 힘겨워한다.
세계 최고 권위의 여자 골프 대회인 US여자오픈에 한국 선수가 한 해 40~50명씩 출전해 10년에 7번 우승컵을 들어 올려 ‘US 코리아 오픈’이라 불리던 시절, 미국 선수들은 “한국 선수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가 한 명의 선수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연습하고, 함께 경기하고, 함께 세계 무대로 진출해,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임진희는 “혼자선 우승을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소미는 “작년 신인 시즌 힘들었는데, 지금 함께 우승을 이뤄 정말 행복하다” 고 말했다.
LPGA투어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데뷔 첫 해였던 지난해 임진희는 신인상 랭킹 2위, 상금 랭킹 18위를 기록했다. 이소미는 신인상 5위, 상금 75위였다.
두 선수 모두 메인 스폰서(주 후원사) 없이 올 시즌을 시작했다. 임진희에게는 지난 4월 신한금융그룹이 세계 무대 도전을 응원하며 키다리 아저씨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소미는 여전히 모자 가운데 후원사 로고가 없는 ‘민 모자’를 쓰고 있다. 그래도 이번 대회 전까지 올 시즌 나란히 ‘톱 10’을 3회씩 기록하며 상승세를 탔다.
임진희는 훈련에 방해된다며 소셜미디어(SNS)를 하지 않고 휴대폰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한국 골프의 레전드 최경주(55)의 완도 화홍초등학교 후배인 이소미는 탱크처럼 중간에 멈추는 법을 모른다. 그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입스(yips·불안 증세)도 극복했다. 박세리와 세리 키즈가 세계 무대를 호령하던 시절 외신은 “여자 골프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임진희와 이소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중간에 꺾이지 않는 마음과 끈끈한 우정으로 기어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수년간 미국과 일본·태국 선수 사이에서 위축되는 것처럼 보이던 한국 여자 골프가 특유의 도전 정신과 뚝심을 회복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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