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십 우승컵을 든 마다솜. /KLPGA
“59타를 쳤을 때 내가 생각한 건 오로지 버디 열차를 ‘계속 달리게 하자’였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하며 공 앞으로 다가갔다. 편안하게 스윙을 하자. 현재 몇 언더인지, 앞으로 몇 언더가 될 수 있을지 전혀 모른다. 그냥 여기서 저기까지 치자.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모든 홀에서 두 번째 퍼트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난 가끔 두 번째 퍼트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첫 번째 퍼트를 약하게 칠 때도 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생각했다. ‘저기 홀이 있다. 홀 왼쪽으로 휘어지니까, 그쪽으로 치자.’ 난 행여 퍼트가 들어가지 않았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풀스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홀에서도 샷이 왼쪽으로 흐르면서 60타를 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난 58타를 치려고 노력하면서 샷을 했을 뿐이다.”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54·스웨덴)은 ‘꿈의 59타’를 친 날 마음속 의식의 흐름에 대해 자신의 레슨서 ‘소렌스탐의 파워골프’에서 소상하게 밝혔다. 소렌스탐은 2001년 3월 16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문 밸리 CC(파72)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 대회에서 8연속 버디를 포함해 모두 13개의 버디를 잡으며 13언더파 59타를 쳤다. 지금도 여자 골프에서 나온 유일한 50대 타수다.
신들린 듯한 경기를 할 때 골퍼들은 ‘그분이 오셨다’고 한다. 국내에서만 그런 표현을쓰는 게 아니다. 2016년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꿈의 타수인 한 라운드 58타를 친 짐 퓨릭(54)은 “내 몸 안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와 경기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어권에선 이런 상태를 두고 ‘존(zone)에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자 골프에서 유일한 50대 타수(59타)를 친 안니카 소렌스탐이 9월 8일 미네소타주 레이크 엘모 로열 골프 클럽에서 열린 청소년 행사에서 골프공을 저글링하고 있다. /AFP연합
2000년대 이후 최다 타수 차 우승 타이기록
9월 29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하나금융그룹 챔피언십(총상금 15억원) 마지막 날 마다솜(25)도 몰입의 경지를 보여줬다. 이글 1개, 버디 9개를 뽑아내며 11언더파 61타를 기록했다. 최종 합계 19언더파 269타를 적어낸 마다솜은 2위(10언더파) 윤이나(21)를 9타 차이로 제쳤다. 2022년 1부 투어에 입성한 마다솜은 지난해 9월 OK금융그룹 읏맨오픈에서 데뷔 첫 승리를 올린 이후 1년 만에 2승째를 올렸다. 9타 차 우승은 2000년대 이후 최다 타수 차 우승 타이기록이다. 1982년 KLPGA 선수권의 20타 차 우승이 최고 기록이다. 2012년 김효주(롯데 마트 레이디스 오픈)와 2017년 이승현(하이트 진로 챔피언십)이 각각 9타 차 우승을 했다. 역대 최다 타수 차 우승은 1982년 고(故) 구옥희 전KLPGA 회장이 KLPGA 챔피언십에서 기록한 20타 차이다. 구옥희 전 회장은 14타 차(1982년)와 13타 차(1981년) 우승을 기록한 적도 있다.
마다솜은 독특한 꿈 이야기를 했다. “2라운드가 끝난 날 무서운 꿈을 꾸었다. 조그만 원숭이 인형을 집 밖으로 던져도 계속 다시 들어오는 꿈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좋은 꿈이었나 싶다.” 원숭이 인형 꿈을 꾼 날은 마다솜의 생일(9월 27일)이었다.
마다솜은 3라운드까지 윤이나(21), 김수지와 공동 선두였고 마지막 라운드를 함께 경기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경기한 마다솜과 윤이나는 네 살 차이에 한국체대 5년 선후배 사이(마다솜 2018학번, 윤이나 2023학번)다. 하지만 국가대표는 중학생 때 태극 마크를 단 유망주 윤이나(2019~2020년)가 먼저 했다. 2020년에는 나란히 국가대표 활동을 했고, KLPGA투어에도 2022년 나란히 데뷔한 투어 동기다. 윤이나는 2년 전 오구 플레이(남의 공으로 경기)로 징계를 받았던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마다솜, 권서연과 같은 조에서 경기했다. 당시 마다솜이 윤이나의 스코어를 확인하는 역할(마커)이었다.
이런 둘의 인연은 호사가들의 이목을 끌었고, 윤이나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몰입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여준 마다솜의 경기력은 윤이나와 인연과는 전혀 무관했다.
장타자로 유명한 윤이나, 김수지와 한 조로 경기한 그는 “나도 적게 나가는 거리는 아니고, 아이언샷에 자신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내 경기에만 집중했다”며 “첫 홀 티샷이 벙커로 갔지만 잘 막았고, 이후 긴 퍼트가 들어가면서 긴장이 풀렸다”고 했다. 마다솜은 초반부터 2번 홀(파4) 8.3m 버디 퍼트와 3번(파4) 홀 7.4m 버디 퍼트를 집어넣으며 치고 나갔다. 이어 4번 홀(파5)에서는 77야드 거리에서 웨지샷 이글을 잡아냈다. 초반 3개 홀에서 4타를 줄인 마다솜의 독주는 후반에도 이어졌다. 10~13번 홀에서 4연속 버디를 잡았고, 16~18번 홀에서 3연속 버디로 경기를 마쳤다. 11번 홀(파4)에서는 10m 버디 퍼트를, 12번 홀(파4)에서는 8m 버디 퍼트를 넣었다.
마다솜은 “초반 긴 퍼팅이 들어가면서 오늘 좀 괜찮나 싶을 때 샷 이글이 떨어졌다”며 “스윙의 한두 가지 키 포인트만 생각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덜 신경 쓰고 내 경기에 집중했다”고 했다.
마다솜은 “아마추어 때 하루에 홀인원, 샷이글이 다 나와 10언더파를 친 것이 개인 최소 타 기록이었다”며 “오늘 같은 퍼트는 나도 처음 겪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마다솜의 최종 라운드 퍼트 수는 23개에 불과했다. 마다솜은 중반 이후 여유 있는 타수 차이였지만 적절한 긴장을 끝까지 유지했다. “후반 4홀 연속 버디를 하면서 ‘우승이 조금 다가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17번 홀을 잘 넘기자는 생각으로 끝까지 열심히 쳤더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2023년 한국여자오픈 준우승할 때 17번 홀 더블 보기, OK금융그룹 읏맨오픈 우승 때도 17번 홀 보기로 연장까지 간 경험이 있다”며 “오늘도 17번 홀을 의식했는데, 16번 홀에서 리더보드를 처음 보고 타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긴장이 누그러졌다”고 말했다.
서너 살 적은 선수들과 투어 동기인 마다솜은 “실력이 늦게 올라와서 고3 때 처음 상비군이 됐고, 국가대표 꿈을 위해 프로 전향도 늦게 했다”며 “내가 늦게 프로가 된 만큼 더 늦게까지 치고 싶은 마음에 롱런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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