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 언니와 (김)효주 언니처럼 후배들에게 잘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드라이버 샷을 240m 넘게 펑펑 때리며 LPGA 투어 언니들을 깜짝 놀라게 한 박서진(15·서문여중 3)은 필드 바깥에서는 수줍음을 잘 탔다. 교복을 입고 나온 그는 목소리도 크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스스로 ‘관종(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란 뜻의 은어)’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주변에 구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신기하게 공이 더 멀리, 더 똑바로 날아가요”라고 했다. 평소 드라이버 클럽 헤드 스피드가 시속 102마일(약 164㎞)인데 누가 구경하면 갑자기 107마일 이상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평균은 시속 94마일이다.
박서진은 지난 22일 경기도 파주시 서원밸리CC 서원힐스 코스에서 열린 LPGA 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공동 13위에 올라 일약 ‘한국 여자 골프 기대주’로 떠올랐다. 호주 교포 이민지(27) 우승으로 막을 내린 이 대회에는 세계 10위 이내 선수 9명이 출전하는 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대회 후원사는 정상급 선수들 이외 추천 선수 몫으로 한국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대한골프협회(KGA)는 유망주 중학생 박서진을 추천했는데 나흘 내내 선두 경쟁을 벌이는 기대 이상 활약을 펼쳤다. 2라운드에서 2오버파를 친 것을 제외하고는 1라운드 68타, 3라운드 67타, 4라운드 69타로 짜임새 있는 경기력을 보였다. 4라운드를 같은 조에서 경기한 앨리슨 코푸즈(25·미국)는 그에게 “지금처럼 패기 있게 경기하면 좋겠어. LPGA 투어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응원했다고 한다. 코푸즈는 올해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하며 상금 순위 1위를 달리는 톱 랭커다.
최근 몇 년간 ‘빙하기’에 가까운 침체에 빠졌던 한국 여자 골프는 최근 유해란(22)이 LPGA 신인상 수상이 유력해지는 등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는 양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올 시즌 한국 여자 선수들이 거둔 승수는 4승에 불과하다. 2019년 15승을 거둔 이후로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내리막길을 밟고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규모가 커지면서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해외 무대 도전을 꺼리는 추세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이런 위축된 분위기를 무서운 중학생 박서진이 바꿔보겠다고 나선 것. LPGA 투어에 진출해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고 싶다는 포부는 한국 골프계를 기대에 부풀게 한다.
박서진은 놀라운 장타력으로 일단 기선을 제압한다. 그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르친 박준범 코치는 “어쩌다 나오는 실수도 거의 없을 정도로 드라이버 샷을 멀리 똑바로 친다”며 “연습 때 마음 놓고 휘두르면 250m를 훌쩍 넘긴다”고 했다. 한국 선수 중 박성현(30), 김세영(30)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장타 능력을 지닌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연습량이 많지는 않다. 하루 2시간 샷 연습을 하고 9홀 연습 라운드를 돈다. 그리고 매일 6㎞씩 걷기 운동을 한다. 매주 필라테스와 골프에 필요한 근력 운동을 약간 하는 정도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살을 빼다 비거리가 준 이후로 코치 선생님이 무조건 잘 먹으라고 한다”며 웃었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도 잘 적응한다. 그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여섯 살 때 처음 골프를 접했다. 골프는 재미있는 놀이이고, 즐기다 보니 놀라운 집중력을 갖게 됐다. “티잉 구역으로 걸어나갈 땐 엄청 떨리는데 막상 샷을 하기 위해 어드레스를 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공만 보인다”고 했다.
1라운드를 함께 경기했던 김세영도 “거리는 저랑 비슷한 편이고 아이언 샷과 쇼트 게임도 어떤 때는 저보다 잘해 깜짝 놀랐다”고 했다. 2라운드 때 함께 경기한 김효주(28) 팬클럽 ‘슈팅 스타’ 회원들에게도 “효주 언니랑 LPGA에서 함께 치면 멋있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서진은 최근 국가대표에도 선발되는 등 경사가 겹쳤다. “뻔한 골프가 아닌 펀(FUN)한 골프를 하고 싶어요. LPGA에 가면 엄마 아빠랑 세계 맛집 순례도 하고 싶어요.” 아직은 중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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