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스 켑카(33·미국)는 지난 4월 마스터스 골프대회 마지막 라운드에서 초반부터 보기를 쏟아내며 욘 람(29·스페인)에게 4타 차 역전패를 당했다. 1~3라운드까지 선두였다가 마지막에 무너졌다. ‘메이저 사냥꾼’이란 호칭이 무색했다. 분한 맘에 며칠 밤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몸은 회복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며 “‘초크(choke·목 졸림 질식)’ 현상이 찾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초크 현상은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부담을 느끼며 수행 능력이 형편 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전문가도 일순 초보자 수준이 될 수 있다. 켑카는 2019년 왼쪽 무릎 인대 재건 수술을 받은 이후 재활 과정을 떠올렸다. 무릎 통증이 심할 때는 침대에서 나오는 데 15분 걸렸고, 무릎이 잘 구부러지지 않아 물리치료사 도움으로 수건을 물고 울면서 재활 훈련을 해야 했다. 그리고 돌아왔다.
이번엔 달랐다. 켑카가 22일 올해 두 번째 남자골프 메이저 대회 PGA 챔피언십(총상금 1750만달러)에서 우승하며 ‘메이저 사냥꾼’이란 명성을 되찾았다. PGA 챔피언십은 세 번째, 메이저 대회는 다섯 번째 우승이다. 그의 경력에서 PGA(미국프로골프) 투어 우승 경험은 9번. 절반 이상이 메이저 우승이다.
브룩스 켑카(미국)가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오크힐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협회(PGA)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들고 있다. 이날 켑카는 최종 합계 9언더파 271타를 기록해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는 PGA 투어 통산 9번째 우승이다. 2023.05.22/AP 연합뉴스
켑카는 이날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오크힐 컨트리클럽(파70)에서 끝난 PGA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7개와 보기 4개로 3타를 줄여 최종 합계 9언더파 271타를 기록, 공동 2위 스코티 셰플러(27·미국)와 빅토르 호블란(26·노르웨이)을 2타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우승 상금은 315만달러(약 42억원). 켑카는 3라운드까지 1타 차 선두였고, 4라운드 초반 2~4번홀에서 3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질주, 추격자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무너진 마스터스 때와는 달랐다. 분수령은 16번홀(파4). 13·14번홀 연속 버디로 1타 차까지 추격한 호블란이 16번홀(파4)에서 티샷을 벙커에 빠트린 뒤 벙커샷 실수로 더블 보기로 무너진 반면, 켑카가 버디를 잡아내 4타 차로 벌어지면서 사실상 승부가 막을 내렸다.
켑카는 이번 우승으로 메이저 5승 이상을 거둔 역대 20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1990년 이후만 따지면 타이거 우즈(48)와 필 미켈슨(53·이상 미국)에 이어 세 번째 ‘메이저 5승 클럽’에 합류했다. 그는 2017~2019년 US오픈(2017·2018년)과 PGA 챔피언십(2018·2019년)을 각각 두 차례 우승하고는 잭 니클라우스(83·미국)의 메이저 최다 승(18승)에 도전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그게 허풍이 아닐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골프전문매체 골프위크는 “건강과 자신감을 회복한 ‘켑카 2.0 시대’가 열렸다”며 “마스터스 준우승과 PG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켑카가 6월 US오픈에서도 우승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켑카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행복하다”며 “더 많은 메이저 대회를 우승해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켑카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후원하는 LIV 골프 선수로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다는 의미도 지닌다. PGA투어와 LIV 골프 대립 구도에도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조짐이다. 미국과 유럽 골프 대항전인 라이더컵 단장 잭 존슨은 “켑카가 실력으로 출전권을 획득한다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PGA 챔피언십에서 LIV에서 뛰는 선수들 선전이 이어지면서 당초 LIV를 고립시키려던 PGA 구상에도 차질이 빚어졌다는 지적이다. 켑카가 우승하고 브라이슨 디섐보(30·미국)가 공동 4위(3언더파), 캐머런 스미스(30·호주)가 공동 9위(1언더파)에 올랐다. LIV 골프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미켈슨은 “LIV에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했다.
이날 모든 시선이 켑카에게로만 간 건 아니다. 투어 전문 선수가 아닌 클럽 프로(레슨 프로)로 일하는 마이클 블록(46·미국)이 공동 15위(1오버파)에 올라 1988년 제이 오버턴(공동 17위) 이후 PGA 챔피언십 사상 클럽 프로 최고 성적을 올렸다. 미국 내 클럽 프로에게 배분되는 출전권을 통해 대회에 나선 블록은 매킬로이와 같은 조에서 4라운드를 하면서 15번 홀(파3·151야드)에서 7번 아이언으로 홀인원까지 잡았다. 시간당 레슨비로 150달러(약 20만원)를 받는 그가 챙긴 대회 상금은 28만8333달러(약 3억8000만원). 1년 치 수입에 가까운 금액이다. 블록은 내년 PGA 챔피언십 출전권까지 획득했다. PGA 투어 다음 대회인 슈와브 챌린지를 비롯해 여러 대회 초청까지 받았다. 블록은 “2만 9000여 클럽 프로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 꿈을 꾸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켑카는 경기 후 블록과 포옹하며 “오늘 밤 당신이 한잔 산다고 들었다”고 농담도 건넸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컷을 통과한 이경훈(32)은 이날 버디 4개와 보기 3개로 한 타를 줄여 공동 29위(5오버파)로 대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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