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서 인터뷰 자리에는 단정하게 하고 나가야 한다고 하셔서요."
350야드 장타를 날리던 전날의 터프가이는 사라지고 수염을 말끔하게 깎은 수수한 모습의 이원준(34)이 공손하게 경어체를 써가며 말했다.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호주 이민을 가 청소년기를 시드니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쭉 살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지난달 30일 제62회 KPGA선수권 대회에서 연장 끝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제62회 KPGA선수권대회에서 프로 첫 승을 거둔 이원준이 지난 1일 오전 인천 서구 청라골프장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
2일 일본 대회 출전을 위해 출국한 그를 하루 전인 1일, 자신이 연습하는 인천 청라 베어즈베스트골프연습장에서 만났다. 지난해 겨울 결혼한 그는 신혼집도 근처에 차려놨다. 오는 가을 태어날 아이가 복덩이라고 한다. 태명은 그가 자란 시드니에서 따와 '드니'라고 지었다며 웃었다.
이원준이 우승했을 때 중계 화면을 통해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우는 모습을 많은 이가 봤다. 그를 골프의 길로 이끌고 뒷바라지한 아버지 이찬선씨도 호주에서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가면 우승 기념으로 한잔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술을 거의 못하시는 데 제가 프로 데뷔하던 때 우승하면 마시자며 고급 위스키 한 병을 사 놓으셨어요. 그런데 13년 만에 병을 따게 됐네요. 그동안 그 술은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하셨어요."
아버지는 농구를 좋아하던 열다섯 이원준을 골프의 길로 이끌었다. 시계 수리와 금은방을 하면서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캐디도 거의 전담했다.
이원준은 얘기하던 도중 왼손 엄지로 오른 팔꿈치 아래 부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꾹꾹 눌렀다.
"틈만 나면 마사지해요. 전문적인 물리치료도 꾸준히 받고 있고 이렇게 혼자서 하기도 하고요. 다시 아파지면 골프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호주의 세계적 골퍼인 제이슨 데이, 마크 레시먼과 비슷한 시기에 골프를 했던 그는 2012년 골프를 그만두고 의대 진학을 준비했었다.
"팔에는 두 개의 긴 뼈가 있는데 한쪽이 너무 길다고 해요. 그 뼈가 오른 손목을 젖히는 동작을 할 때마다 연골을 다 갉아버린 거죠. 어릴 때부터 조금씩 아팠는데 2012년에는 1년 동안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혼자서는 머리도 못 감고 양치질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의사는 골프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2006년 말 프로로 전향하면서 LG전자와 연 2억원씩 10년 장기 후원계약(5년 후 5년 재계약)을 맺었다. 그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본 허광수 현 대한골프협회 회장이 LG그룹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후원을 부탁했고, 구 회장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계약은 5년으로 종료됐다.
"아시안투어를 거쳐 2008년부터 미국프로골프 2부 투어에서 뛰었죠. 준우승만 세 차례 했어요. 늘 한 걸음이 부족해 1부 투어에 진입하지 못했는데 드라이버 입스에 이어 손목 부상까지 겹쳤어요."
LG전자는 다시 도전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했지만, 선수의 도리상 그만두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골프를 그만두고 2년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친구 따라 볼링장에 갔다. 아무 생각 없이 쳤는데 손목이 괜찮았다. 골프를 다시 해보라는 친구 권유에 채를 휘둘렀는데, 거짓말처럼 아프지 않았다. 볼링의 손목 동작을 따라 하니 드라이버 입스도 어느 정도 고쳤다고 한다. 그는 퀄리파잉 테스트를 거쳐 2015년부터 일본투어에서 뛰었다.
"지난해 일본투어에서 브룩스 켑카와 1, 2라운드를 같이 치면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거리가 비슷하거나 제가 더 나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유심히 보니 켑카는 왼 손등을 클럽 페이스와 평행하게 하면서 정확성을 높이더군요. 저도 그 뒤로 드라이버를 펑펑 때리게 됐어요."
이원준은 "우선 한국과 일본에서 좀 더 우승하고 다시 PGA투어를 도전하고 싶다"며 "저를 기다리고 믿어준 분들께 꼭 보답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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