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과 1993년 두 차례 마스터스 그린 재킷을 입었던 베른하르트 랑거(67·독일)는 2라운드 14번 홀까지 중간 합계 이븐파를 기록하고 있었다.
최고령 마스터스 컷 통과 기록이 눈앞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전날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의 공을 삼켰던 15번 홀(파5) 그린 앞 해저드가 이번엔 ‘백전 노장’의 발목을 잡았다. 세 번째 샷이 그린 중앙에 떨어졌지만 백스핀이 걸린 공은 경사면을 타고 연못으로 굴러 떨어졌다. 더블보기로 2오버파. 마지막 18번 홀(파4)에서 파만 기록하면 컷 통과가 가능했다. 하지만 파 퍼트는 아쉽게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3오버파 147타(공동 54위). 1타 차이로 컷을 통과하지 못했다. 마스터스는 공동 50위 이내 선수가 3라운드에 진출한다.
랑거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모자를 벗자 18번 홀을 에워싸고 있던 팬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를 기다리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 프레드 리들리 회장도 랑거를 포옹하며 직접 작별 인사를 건넸다.
랑거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라운드였으니 즐기려고 노력했다. 이 코스의 아름다움, 매 홀 마주치는 도전들, 갤러리의 응원을 온몸으로 느꼈다. 정말 특별한 이틀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어제 1번 홀로 걸어가는데 팬들이 박수를 보내줘서 거의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러면 안 돼. 아직 경기해야 하잖아’ 마음을 다잡았다”고 털어놓았다. 랑거는 “이후에도 코스 곳곳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고, 오늘 18번 홀로 올라올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컷 탈락이 아쉽지 않았을까. “스스로 경기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바람이 따라주지 않았다. 15번 홀에서는 완벽한 웨지 샷에 스핀이 걸리면서 물에 빠져 결국 7타를 쳤다. 완벽한 샷에서 7타가 나오는 건 속상한 일이지만, 그게 골프다. 가장 멋진 게임이지만, 때로는 가장 잔인하기도 하다”고 했다. “조금 더 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잘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코스는 내게 너무 길다. 첫 라운드부터 이 코스와 사랑에 빠져 많은 추억을 쌓았다.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오랫동안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큰 축복이었다”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마스터스 개막을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랑거는 골프 인생의 등대 같았던 마스터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1957년 8월 27일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에서 태어난 랑거는 1982년 처음으로 마스터스에 출전해 1985년 처음 정상에 올라 마스터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평생 출전권을 얻었다. 1993년 두 번째 그린재킷을 입었다. 올해 89회 대회를 치르는 마스터스에 랑거는 41번째 출전했다.
베른하르트 랑거가 마스터스 고별 무대인 2025마스터스 2라운드를 마치고 아들이자 캐디인 제이슨을 포옹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랑거는 “고작 800명이 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골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환경에서 마스터스에 1982년 처음 초청을 받았고 세 번째 출전 만에 우승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여정이었다”고 했다. “수십 그루의 큰 목련 나무 사이를 300m나 뻗어 있는 진입로를 따라 천천히 승용차를 몰고 가니 클럽하우스가 나왔다. ‘매그놀리아 레인(목련 길)’은 꿈의 무대로 가는 길이었다”며 “이렇게 깔끔하게 정비된 골프장,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대회를 본 적이 없었다. 마스터스 브랜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마스터스는 특별하다”고 밝혔다.
가난한 집 출신 소년 랑거는 아홉 살 때 동네 골프장에서 캐디백을 메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에 끌려가다 가까스로 탈출해 그곳이 소년의 고향이 됐다. 대부분 주민이 골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시간을 잘 지키고 성실한 그는 캐디 일을 하는 틈틈이 골프를 배워 열다섯 나이에 프로 골퍼가 됐다. 랑거는 “당시 독일에서 골프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롤 모델도 없었고 기량을 누구와 비교해야 할지 몰랐다. 독학밖에 없었다. 캐디를 하던 형의 도움을 받았다. 아홉 살에 캐디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돈을 먼저 좋아하게 됐고 그다음에 골프를 진정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1982년 패기 넘치던 스물다섯 살 서독 출신 골퍼가 처음 맞닥뜨린 마스터스는 이후 평생 무기가 된 값진 깨달음을 일깨운다.
그는 “완벽하게 관리된 잔디에 스피드가 빠르고 급경사를 지닌 오거스타의 유리알 그린은 ‘골프란 그렇게 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하듯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36홀 동안 무려 11번의 3퍼트. 1타 차이로 컷을 통과하지 못해 2라운드 만에 짐을 싸면서 골프가 얼마나 정교한 세계이고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고 한다. 유리알 오거스타 그린의 홀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퍼팅 이전에 두 번째 샷에 오차가 없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티샷부터 완벽한 마스터플랜이 서 있어야 했고 그걸 실행할 능력이 있어야 했다. 골프 사상 가장 전략적인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랑거의 골프가 탄생한 기원이 바로 마스터스였던 것이다. 랑거는 1985년 마스터스를 정복하고는 빨간 티셔츠 위에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그린 재킷을 의기양양하게 입었다. 그는 1993년 한 차례 더 그린 재킷을 입으며 현역 시절 두 차례 메이저 우승을 마스터스에서 장식했다.
공포의 빨간 셔츠로 유명한 타이거 우즈(미국) 이야기도 꺼냈다. 랑거는 “’빨간 셔츠의 원조는 우즈 당신이 아니고 바로 나’라고 우즈를 놀리고는 했다”고 했다.
그는 50세 이상 선수가 참가하는 미 PGA 챔피언스 투어에서는 최다승 기록, 최고령 우승 기록 등을 세우며 통산 47승을 거두었다. ‘시니어 투어의 제왕’이라 불린다. 이런 그가 평생 출전권이 보장된 마스터스 출전권을 미련 없이 반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작년에 이미 그만두고 싶었으나 아킬레스건 수술 때문에 늦어졌다. 선수로서 오거스타에서는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했다. 저는 7100야드 수준의 코스에서 경기하는 데 익숙하고 그곳에서는 경쟁할 수 있다. 그러나 오거스타처럼 7500야드 이상의 코스에서 경기하는 것은 어렵다. 연습 라운드를 간신히 걸으면서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챔피언스 투어는 카트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오거스타처럼 경사가 심한 코스를 나흘 동안 걸으면서 경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설명이었다.
“코스는 길어지는데 내 샷 거리는 짧아진다. 한창 때인 선수들이 9번 아이언을 들 때 나는 하이브리드 클럽을 잡는다. 더는 경쟁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고 덧붙였다.
랑거는 열아홉 나이에 병역 복무 중이던 독일 공군에서 완전무장 행군을 하다 척추 스트레스 골절과 디스크에 걸려 골프채를 놓아야 할 형편이 됐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는 이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50년 넘게 지금도 피트니스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금욕적 생활과 꾸준한 운동, 식이요법으로 지금도 군살 하나 없는 174㎝·72㎏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아멘 코너’의 13번 홀(파5)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1985년 3라운드에 이 홀에서 이글을 잡아내며 우승 경쟁에 나섰고, 1993년 4라운드에는 이글을 잡아 우승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홀 중 하나가 됐는데, 이글 때문만은 아니다. 홀이 아름답고 전략적으로 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 경력의 4분의 1이라도 이루고 싶다면 선배로서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뛰어난 선수가 되려면 완벽하게 헌신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골프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높아지고 나아질수록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한 사람이 포기할 때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1000명도 넘는다. 그렇기에 매우 집중하고, 확고한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된 삶을 살면서 무언가 포기할 각오도 해야 하며,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랑거는 “골프는 깨지기 쉽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마치 주식시장 같다”는 말을 했다. “잡히는가 하면 또 달아난다. 메이저 우승자라 할지라도 2년쯤 지나면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 게 이 바닥이다. 나는 그저 신의 은총을 받은 것뿐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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