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넬리 코르다가 있는데 앞에는 렉시 톰프슨이 지나가고.... 리디아 고 언니랑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말 LPGA 투어에 왔구나 (꿈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다 4개 대회(유럽 투어 1개 포함) 컷 탈락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투어 2년 차로 접어든 임진희(27)는 털털하다. 자기 일을 마치 남 일처럼 객관화해서 얘기하는 독특한 화법을 지니고 있다. 그런 게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전지 훈련 중인 그와 전화로 만났다. 골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그는 고교 시절부터 휴대 전화를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머니 전화로 통화했다.
임진희는 이른바 늦깎이다. 중3 때 본격적으로 골프 선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개 초등학교 때 입문하는 다른 선수들보단 출발이 늦었다. 국가대표 경력도 없다. 3부 투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1부 최고 선수 자리까지 올랐다. 한국 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021년 1승, 2022년 1승, 2023년 4승 등 통산 6승을 거둔 뒤 지난해 LPGA 무대에 뛰어들었다. 첫해 신인 순위 2위에 올랐고 상금 순위 18위(137만7818달러)로 마감했다. 성공적인 데뷔란 평가다. 지난해 11월 안니카 드리븐 대회에선 준우승을 차지했고 6차례 ‘톱10′ 성적을 냈다. 경기 도중 표정 변화가 없다 해서 ‘돌부처’, 훈련량이 많고 “노력하면 된다”는 자기 확신이 강해 ‘연습 벌레’ ‘노력의 화신’ 등으로 불렸다.
올해는 2월 6일 개막하는 파운더스컵이 출발선이다. 지난해 통계를 바탕으로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지난해 “벙커 세이브율(공이 벙커에 들어가도 파나 파보다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이 낮아 동계 훈련 기간 벙커에서 살다시피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평균 드라이브샷은 260.88야드(68위)에 페어웨이 안착률 69.10%(109위), 그린 적중 시 퍼트 수 1.79(30위), 벙커 세이브율 40.91%(96위). 이 대목이 승부처다.
뒤늦게 LPGA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자신감을 얻은 소중한 시간이면서 희비가 컸던 한 해였다. 코스에 적응하고 나서야 원래 제 모습을 써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상당수 전문가가 그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보란 듯 그 예상을 깼다. 그의 장점은 버디를 잡아내는 능력. 지난해 평균 타수 9위(70.43타)에 버디 수는 6위(339개)였다. 24개 대회 21회 컷 통과(11위)를 기록할 정도로 안정적인 스코어 관리 능력도 있다. “아직 골프 선수로서 성장하고 있다. 공격적 골프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코스들을 돌면서 평균 버디율 6위에 오른 게 뿌듯하다. 올해 경험을 바탕으로 큰 실수들만 가지 쳐주면 금방 더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겨루는 LPGA 무대답게 배운 게 많다. “(LPGA 투어 신인상을 차지한) 사이고 마오(일본)는 짧게 치지 않는데도 굉장히 똑바로 치더라. 지노 티띠꾼(태국)은 골프 흐름을 잘 판단한다. 리디아 고 언니는 쇼트게임이 탁월한데 벙커샷을 제일 잘했다. 패티 타와타나낏(태국)은 드라이버 거리를 20~30m 길게, 짧게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샷을 실수해도 그린 주변 쇼트게임으로 극복한다. 넬리 코르다는 못하는 게 없고 다 잘한다. 톱 클래스 선수들이라 그런지 다들 대단했다.”
그렇다면 뭘 느꼈을까. 임진희는 “코르다처럼 못하는 게 하나도 없거나 자기 장점이 뚜렷하거나 둘 중 하나는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코스가 달라져도 코스 세팅이 비슷하다. 미국은 긴 코스, 좁은 코스, 하루 10언더파는 쳐야 하는 쉬운 코스, 너무 어려워서 이븐파도 쉽지 않은 코스 등 너무 다양하다. “어려운 코스에서 성적이 잘 나는 편인 만큼 방향성만 잘 잡아주면 타수를 더 줄일 수 있다”면서 “마지막 서너 홀에서 흔들리던 실수를 줄이고 오히려 타수를 줄이는 구간으로 만드는 것도 과제다”라고 했다.
LPGA를 호령하던 한국 여자 골프는 최근 예전 위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3승으로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적은 승수를 기록했다. 임진희는 “베테랑 김세영 언니가 잘 말씀해주셨다. 우승 많이 할 때보다 15명 이상 한국 선수가 줄었는데 최근 국내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다시 LPGA 투어 무대에 도전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다시 우리의 시간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
올해 여건은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올 시즌을 앞두고 경제 불안 여파로 메인 후원사가 없어졌다. 변화도 있었다. 전성기 쩡야니(대만) 선수와 함께했던 캐디를 영입했다. 그는 “LPGA 투어 우승과 장래 세계 1위라는 어릴 때부터 꿈을 잊어 본 적이 없다”면서 “꼭 LPGA 투어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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