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박세리와 김미현, 강수현, 한희원 같은 선수들이 함께 아마추어로 뛰던 시절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무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박세리가 동료에 밀려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내부 경쟁이 치열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신지애, 최나연이 국내에서 경쟁하고 박인비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시기도 한국 여자 골프가 또 한번 도약할 것이란 기대를 갖기에 충분할 만큼 뛰어난 선수들이 넘쳤다. 1995년생 동갑인 고진영, 김효주, 백규정, 김민선 등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도 비슷했다. 그런 질적 도약을 이뤄줄 가능성을 지금 대표팀 선수들이 보여준다.”
'신(新) 황금 세대'의 출현
대한골프협회 강형모 회장은 30년 가깝게 세계 무대를 쥐락펴락하던 한국 여자 골프의 전성기를 다시 만들어줄 ‘신황금 세대’의 출현을 기대했다. 그가 선수단을 이끌고 갔던 지난해 세계여자아마추어팀 선수권에서 한국은 7년 만에 우승했고, 그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3월 23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고 권위의 아마추어 여자 대회인 퀸 시리키트컵에서는 5년 만에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했다.
한국 여자 골프의 LPGA(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 지배력이 예전 같지 않은 가운데 한국 여자 골프 미래의 주역들이 세계 무대를 차근차근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제44회 퀸 시리키트컵에 한국은 김시현(18), 이효송(16), 오수민(16) 등 국가대표 3명이 참가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클리어워터 골프클럽에서 열린 대회 마지막 날 4라운드에서 오수민은 보기 없이 버디 7개를 잡아내며 1~4라운드 합계 5언더파 283타를 기록했다. 3라운드까지 1타 차 2위였던 오수민은 2위 세라 해밋(호주)을 4타 차로 따돌리고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이효송이 3위(1오버파 289타), 김시현이 4위(2오버파 290타)에 올랐다. 오수민과 이효송, 김시현이 팀을 이룬 단체전에서 합계 9언더파 567타를 적어내 일본(2언더파 574타)을 7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한국이 이 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쓴 것은 2019년 이후 5년 만이었다.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에 오른 오수민은 “첫날 성적(76타)이 저조해서 걱정을 조금 했지만, 서로 격려하고 힘을 북돋워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국가대표 첫해인데 이렇게 큰 대회에 단체전과 개인전을 모두 우승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쁘다”며 팀워크를 우승 원동력으로 꼽았다. 민나온(36) 코치는 “현재 대표 선수들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도 적극적이고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여러 경험이 많이 쌓이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높게 평했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지난해 세계여자아마추어팀 선수권에서는 김민솔(18), 서교림(18), 이효송으로 구성된 한국팀이 72홀 합계 22언더파 554타를 기록해 2위 대만(18언더파), 3위 스페인(17언더파)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재 대표팀은 퀸 시리키트컵에 참가한 3명과 김민솔, 양효진(17), 박서진(16) 등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LPGA투어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도 초청 선수로 참가해 쟁쟁한 언니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경기를 한다. 오수민은 3월 10일 KLP GA투어 개막전이었던 하나금융그룹 싱가포르 여자오픈에서 3위를 차지했다.
김민솔은 2022년 LPGA투어 대회인 BMW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공동 1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데 이어, 지난해 KLPGA투어 한국여자오픈 4위, 두산건설 위브챔피언십 9위, OK금융그룹 읏맨오픈 5위 등 세 차례나 톱 10에 오르며 ‘무서운 10대’ 돌풍을 이끈다. 이효송은 한 번 우승도 어렵다는 강민구배 한국여자 아마추어 선수권을 열네 살과 열다섯 나이에 2연패한 승부사로 유명하다. 이들 외에도 양효진과 박서진도 고교생 신분으로 언니들과 거침없는 대결을 벌여 황금 세대 한 축을 일구고 있다. 박서진은 2023년 BMW레이디스 챔피언십 공동 13위, 양효진은 지난해 KLPGA 드림투어 왕중왕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이들의 꿈이 세계 무대를 향한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한국 여자 골프는 2020년대 들어 KLPGA투어가 대회 수와 상금 액수 모두 역대 최고의 성장을 보이면서 오히려 세계 무대 경쟁력이 뒷걸음질치는 역설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가 겹치면서 해외 무대 진출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사이 2021년 넬리 코르다(미국)가 금메달을 차지한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은 ‘노메달’ 수모에 그쳤고, 지난해에는 LPGA투어 5대 메이저대회 가운데 1승도 따내지 못했다.
2008년생인 이효송은 “우리 세대는 2016년 박인비 언니가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며 골프의 꿈을 키웠기 때문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고 했다.
올해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이는 오수민은 ‘오차원’이란 별명으로 알려졌다. 물에 뻔히 빠질 것 같아도 해저드 넘기는 샷에 도전하는 과감성 때문이다. 꿈을 물어보니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올림픽 금메달, 여자 골프 세계 1위,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되는 걸 넘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무대, 그러니까 남자 선수들에게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하나금융그룹 대회 마지막 18번 홀(파5)에서는 티샷을 한 뒤 드라이버로 두 번째 샷을 해 투온을 노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무조건 세게 치라고 해서 세게 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김민솔은 고진영, 리디아 고의 스윙 코치인 이시우 코치와 4년 전부터 훈련하고 있다. 전지 훈련 기간 고진영의 룸메이트를 하면서 세계 1위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고진영이 세계 무대에서 뛰려면 웨이트 트레이닝이 중요하다며 방에서도 힘든 코어 트레이닝을 하면 따라 했다. 김민솔은 “언니는 골프를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을까 고민한다”며 “그런 생각을 함께하면서 골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동기부여가 된다”고 했다.
김시현은 “올림픽 금메달, LPGA투어 5대 메이저 대회를 두 개씩 우승해서 10승을 거두는 것,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것” 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밝혔다. 이들은 정말 골프가 좋아서 한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세대다. 스스로 ‘연습광’이라고 한 이효송은 “골프가 제일 좋은 점은 열심히 연습하면 보답이 돌아오는 것”이라며 “공이 홀컵에 들어가는 순간이 제일 좋다”고 했다. 양효진은 체력을 기르고 싶어 패러글라이딩을 배운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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