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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릴리아 부가 8월 13일 런던 남서부 월턴온더힐의 월턴 히스 골프 클럽에서 열린 2023년 브리티시여자 오픈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 후 환호하고 있다. 사진AP연합

2020 도쿄 올림픽은 20년 넘게 세계 최강을 호령하던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 터닝 포인트였다.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19 사태로 예정보다 1년 늦은 2021년 여름에 열렸다. 도쿄 올림픽 금메달은 넬리 코르다(미국), 은메달은 이나미 모네(일본), 동메달은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각각 차지했다. 


당시 한국은 박인비(23위)와 김세영(15위), 고진영, 김효주(이상 공동 9위) 등 네 명이 참가했는데 찜통더위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하지만 원래 골프는 다양한 기후 조건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유독 네 명의 한국 선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그런 변명이 통하는 곳이 아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박인비(35)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금메달을 땄던 한국 여자골프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며 내심 금·은·동 석권까지 바랐지만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한 채 물러섰다.


셀린 부티에가 7월 30일 프랑스 알프스 에비앙 레뱅에서 열린 여자 LPGA 메이저 골프 대회인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프랑스 국기를 두른 채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2020 도쿄 올림픽 ‘노메달’ 충격


가장 먼저 객관적인 실력에서 한국이 지난번 올림픽보다 정체된 반면 외국 선수들 기량 향상이 두드러졌다. 골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하면서 골프를 평생의 목표로 삼거나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거는 외국 선수가 확 늘었다. 그 영향으로 5년 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계 각국의 근육질 여전사들이 2020 도쿄 올림픽에 대거 참가했다.


당시 한국 선수와 외국 선수의 차이를 인상적으로 가른 건 우산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따가운 햇볕에 그을릴까 봐 코스 이동 중에 골프 우산을 쓰고 다니는 데 반해, 대부분 외국 선수는 햇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국내 관계자 한 명은 “외국 선수들이 운동선수라면 한국 선수는 연예인이나 프로암 참가자 같았다”고 했다. 햇볕도 햇볕이지만 우산에 새겨진 브랜드 로고를 간접 홍보하려는 선수들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대회 도중 우산을 쓰는 선수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글로벌 스탠더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2024 파리 올림픽을 1년 앞둔 한국 여자골프는 도쿄에서보다 한 계단 더 추락한 모습이다. 2021년 메이저 대회 무관이었던 한국은 2023년에도 5개 메이저 대회에서 빈손으로 돌아섰다.


1998년 박세리 맨발 신화 이후 20년 넘게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던 한국 여자골프는 어디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2023년 LPGA 메이저 대회서 한 번도 우승 못 해


“세계 넘버원 KLPGA∼, 세계를 향해∼.”


KLPGA의 로고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투어는 한국 여자골프의 근간이다. 하지만 올해 KLPGA투어 선수들이 해외 무대에서 거둔 성적은 한참 거리가 멀다. 최근 3년간 국내 무대를 평정한 박민지(25)는 올해 US여자오픈 공동 13위, 에비앙챔피언십 공동 20위에 그쳤다. 김수지(27)가 에비앙챔피언십에서 공동 9위를 차지한 게 눈에 띄는 성적이다. LPGA투어 선수들 활약도 기대에 못 미치면서 한국 선수들은 2021년에 이어 올해도 5개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잔디가 다르고 시차 적응 등 해외 무대의 낯선 환경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로고송처럼 KLPGA투어 정상이 세계 정상급이던 시절이 있었다. 신지애(35)는 KLPGA


투어에서 뛰던 200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비회원으로 브리티시여자오픈(현 AIG여자오픈)을 비롯해 LPGA투어 3승을 거두었다. 


2011년 유소연(33)이 US오픈, 2014년 김효주(28)가 에비앙챔피언십, 2015년 전인지(29)가 US오픈 정상에 오르는 등 KLPA투어 선수들이 LPGA투어 메이저 무대를 휘저었다. 이런 흐름은 코로나19로 12월에 치러진 2020년 US오픈에서 KLPGA투어 소속이던 김아림(28)이 우승하고는 맥이 끊겼다. 


2015년부터 김세영(30), 전인지, 박성현, 고진영(28), 이정은(27)으로 5년 연속 한국 선수들이 차지했던 LPGA투어 신인상 계보는 태국 선수들에게 넘어갔다. 


KLPGA투어는 최근 수년간 급격하게 몸집을 불려 올해 대회 수 32개, 총상금 318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가 됐다. 상금뿐만 아니라 한국 정상급 선수들은 국내외 기업의 다양한 후원으로 인기를 얻게 되면 또래 외국 선수는 상상도 하기 힘든 후원을 받는다. 하지만 척박하던 환경에서 세계 경쟁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나오던 것과 달리 여건이 좋아지면서 오히려 ‘안방 호랑이’가 됐다. 국내 환경이 좋다 보니 정상급 선수들도 이동 시간이 길고 성공 가능성도 불투명한 해외 진출을 주저한다.


고진영은 “LPGA투어의 세대교체가 너무 빨라 한국 선수 막내인 유해란(22)보다 어린 외국 선수들이 즐비하다”며 “운동 능력이 뛰어난 미국과 유럽 선수가 늘고 있고 태국이나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 못지않게 훈련량이 많다”고 했다. 이런 추세로는 국제 무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세계 무대와 동떨어진 한국 골프 환경


한국의 골프 환경은 세계 무대와 동떨어졌다는 지적을 받은 지 오래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주니어 선수는 한 해 골프 비용으로 1억원에서 1억5000만원이 드는 게 일반적이다. 인구 감소와 함께 이런 고비용을 견디지 못해 유소년 선수가 점차 줄고 있다. 코로나19 특수로 많은 돈을 번 골프장들 대부분 주니어 선수에게 일반 성인 요금을 적용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KLPGA투어는 한 라운드에 5시간 반이 넘기 일쑤인 늑장 경기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LPGA투어나 일본 투어는 4~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규정 적용이 느슨한 탓이다. 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일반 손님을 받아 대회 코스 기준에 턱없이 미흡한 대회들도 많다. 


여러 후원사의 지원을 받으면서 선수들이 프로암 등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며 훈련 시간이 부족한 경우도 늘어난다. 프로암 수요가 늘면서 한 라운드에 수백만원에서 1000만원에 이르는 비용을 받는 경우가 입에 오른다. 자국 시장에만 전념하다 국제 경쟁력을 잃는 현상을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 한다. 남태평양 갈라파고스 제도가 육지에서 고립돼 고유한 생태계가 만들어진 데서 나온 말이다.


내년 6월 말 세계 랭킹 기준으로 파리 올림픽 골프 출전권이 결정된다. 국가당 두 명이 출전하지만 15위 이내는 네 명까지 나갈 수 있다. 한국은 2016년과 2020년 올림픽에 모두 네 명씩 나갔다. 현재 15위 이내는 고진영과 김효주 둘뿐이다. 세계 넘버원을 자부하던 한국 여자골프와 KLPGA투어가 ‘그들만의 갈라파고스’로 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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