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마음먹고 볼을 쳐봤다. 당시 서울컨트리클럽의 연습 볼이 5000개였을 때였다. 손수레에 모두 실으면 4000개 정도는 됐고. 여기서 손님들이 칠 볼은 좀 빼놓고 쳤다. 정확하게 3620개를 쳤다.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 20분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골프장이 쉬는 날 두 회원과 하루 최대 몇 홀을 라운드할 수 있는지 도전하기로 했다. 오전 6시에 시작해 90홀을 소화하고 한 사람은 탈락했다. 나와 다른 한 사람은 해가 져서 더는 라운드할 수 없을 때까지 했는데 113번째 홀 두 번째 샷까지 하고 난 뒤였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한장상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은 엊그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1940년생인 그는 한국 최초의 프로골프 대회인 1958년 ‘제1회 KPGA 선수권대회’부터 2007년 ‘제50회 KPGA 선수권대회’까지 50년 연속 단일 대회에 출전한 한국 골프의 전설이자 산 증인이다. 그는 1954년 집 근처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캐디로 처음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1958년부터 국내에서 통산 19승, 일본에서 3승을 거뒀다. 그는 제6대 KPGA 회장(1984~87년)도 지냈다.
한장상은 천하무적이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는 한국오픈과 KPGA 선수권 단 두 개뿐이었다. 1960년부터 1972년까지 13년간 26차례 대회에서 한장상은 그 절반이 넘는 14승을 거두었다. 그는 1969년 9월 KPGA 선수권부터 1972년 4월 한국오픈까지 2년 7개월 동안 열린 6개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코리안투어 최다 연승 기록이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한국오픈 4연승, 1968년부터 1971년까지 KPGA 선수권대회 4연승을 거두며 나란히 7승을 거뒀다. 앞으로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들이다.
7월 20일부터 나흘간 충남 태안 소재 솔라고컨트리클럽에서는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아너스K·솔라고CC 한장상 인비테이셔널이 열렸다. 한장상 KPGA 고문이 호스트를 맡아 치르는 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골프 레전드를 기려 인비테이셔널 형식으로 열리는 대회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 세 개 있다. 타이거 우즈(48·미국)가 호스트인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작고한 아놀드 파머(1929~2016·미국)의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 잭 니클라우스(83·미국)가 주최하는 메모리얼 토너먼트다. 코리안투어에선 최경주 인비테이셔널(현대해상화재 후원)과 한장상 인비테이셔널 두 개다.
캐디가 되고 1년 지나 골프장 손님으로부터 낡은 아이언 5번과 7번을 얻어 골프를 시작했다. 남들 흉내 내가면서 골프를 배웠지만 타고난 체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량으로 ‘아이언의 달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하루 1000개 이상의 볼을 쳤다. 낡은 골프화를 얻어 신고 맨땅에서 맨손으로 클럽을 잡고 볼을 쳤다. 연습 후에는 면도날로 손에 박인 굳은살을 깎아냈다. 그는 작은 체격(167㎝·67㎏)이지만 장타에 승부 근성이 강했다.
그는 퍼시몬 헤드 드라이버로 290야드를 날렸다. 그는 1960년대 초반 홍콩오픈에서 드라이버 샷 경연대회에 나가 283야드를 쳐서 2등을 차지한 적도 있다. “나는 어깨와 팔 힘이 누구보다 좋았다. 특히 팔씨름은 절대 지지 않았다. 1970년쯤인 것 같은데 홍콩오픈을 끝내고 태국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대부분 선수가 한 비행기를 탔다. 그 비행기 안에서 팔씨름 대회가 열렸는데 리그전 방식이었다. 내가 결승에서 노랑머리 선수를 이겼다. 동양 선수들이 누구보다도 좋아했고. 마침 그 비행기의 스튜어디스가 한국인이었는데 샴페인을 터뜨려 주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골프 스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군 생활을 처음 했던 1962년으로, 박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됐을 때다. 박 대통령은 보기 플레이 정도 실력이었는데 그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하는 퍼팅은 딱 한 번이면 충분하다며 한 번만 했다. 1966년 태릉컨트리클럽이 개장한 뒤로 서울컨트리클럽과 태릉에서 박 대통령과 아홉 번 라운드를 같이했다. 서너 번 식사 자리에도 참석했다. 그때마다 골프 이야기는 없고 나라 걱정뿐이었다. 1966년 안양컨트리클럽이 생기면서 이병철 회장의 요청으로 3년간 헤드 프로로 일했다. 이 회장은 싱글 골퍼였다. 1958년부터 연덕춘 선배에게 골프를 배우셨고 1965년부터는 내가 봐 드렸다. 드라이버 거리는 짧았지만, 쇼트게임 실력이 대단했다.”
티샷을 멀리 치고 아이언 샷이 정교한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일본프로골프투어(JGTO)도 정복했다. 한장상은 1972년 일본 내셔널 타이틀 대회인 일본오픈에서 1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 한 번도 선두를 놓치지 않고 ‘와이어 투 와이어(wire to wire)’ 우승을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고(故) 연덕춘(1916~2004년) 고문 이후 31년 만에 한국인이 거둔 두 번째 대회 우승이었다. 일본오픈 우승은 그를 ‘꿈의 무대’ 마스터스로 이끌었다. 1973년 마스터스에 전년도 일본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출전한 것이다. 2003년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마스터스에 출전했던 최경주보다 30년 빨랐다.
올해는 그의 마스터스 출전 50주년이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시카고를 거쳐 오전 0시가 넘어 오거스타 공항에 도착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고 영어도 통하지 않았다. “한국 선수가 마스터스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달려온 재미교포 태권도 사범의 안내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에서 연습 라운드를 끝내고 대회에 임할 수 있었다.”
그의 영웅 아놀드 파머도 만났다. “연습하고 있는데 아놀드 파머가 다가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악수했다. 함께 훈련하던 중 2번 아이언 샷이 오른쪽으로 자꾸 밀리니까 이렇게 쳐보라며 개인 지도도 해줬다. 실력과 인품을 갖춘 위대한 선수였다”고 했다. 그는 아쉽게 1라운드 5오버파 77타, 2라운드 3오버파 75타로 합계 8오버파 152타, 1타 차로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죽기 전에 한국 선수가 꼭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년이면 내가 골프를 시작한 지 70년이 된다. 젊었을 때 정말 이 악물고 골프를 쳐서 그런지 지금은 이도 아프고 목도 아프다”고 했다. 그는 “선수라면 골프에 대해 항상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연습해서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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