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거스타 내셔널 위민스 아마추어 대회에출전한 이정현 선수. 사진 오거스타 내셔널 위민스 아마추어(ANWA)
코로나19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지난 겨울 많은 국내 골프 선수가 해외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미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 남자 선수들과 겨루고 싶다면서 떠난 중학교 졸업반 골퍼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2019년 송암배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중학교 2학년이던 2020년 내셔널타이틀대회인 강민구배 한국여자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유망주 이정현(16) 이야기다. 이정현은 지난해 12월 13일 포르투갈의 남부 해안 도시 알그레브로 떠났다. ‘포르투갈의 보석’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관광 명소이지만 휴가가 아닌 훈련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큰맘 먹고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딸은 두 달 넘게 장기체류하며 미니투어(참가자들이 돈을 내고 성적에 따라 상금을 받는 지역 투어)에서 포르투갈 남자 성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었다. 그리고 3월에는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두 개의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고는 4월 4일 귀국했다. 이정현은 올해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국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정현의 아버지 이기희씨에게 들어보니 이런 독특한 훈련에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 2년간 한국프로골프(KPGA)투어에서 거센 10대 돌풍을 일으켰던 김민규(21)다. 김민규는 중학교 졸업 직후 유럽으로 나갔다. 유럽 3부 투어에서 시작해 2018년 챌린지 투어(2부 투어) D+D 체코 챌린지에서 우승했다. 김민규는 코로나19 여파로 유럽 투어가 중단되자 한국에 들어와 지난 2년간 KPGA투어 무대에서 우승 경쟁을 벌이며 활약했다. 포르투갈 알그레브에 가면 미니투어에서 남자 선수들과 대회를 하며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정보를 김민규의 해외 진출 과정을 도왔던 이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골프 불모지나 다름없던 세계 골프의 변방 한국에서 여자골프가 30년 가까이 세계무대를 휩쓴 원동력에는 박세리, 박인비라는 뚜렷한 성공 모델과 ‘나도 할 수 있다’며 이를 따르는 많은 집단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한국여자프로골프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 정상을 목표로 미국 무대로 떠났다. 구옥희를 비롯한 여자 골프 1세대가 기회의 땅으로 찾아간 곳은 일본이었다. 박세리의 발길을 일본이 아닌 미국으로 돌린 건 삼성그룹이었다. 고교 시절 이미 프로 무대를 휩쓴 박세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삼성그룹은 박세리가 1997년부터 미국에서 유명 교습가인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레슨받도록 지원했다. 세리 전담팀을 만들어 국내와 해외를 모두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과 함께 정상에 오른 사건은 한국 골프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게 되는 분수령이 됐다. 한국 프로 골퍼들의 미국 진출이 늘기 시작했고 여러 기업이 적극적으로 선수 후원에 나섰다. 지금도 한국 여자 골퍼의 대표적인 성장 모델이다.
‘세리키즈’의 선두주자 박인비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예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연습이나 투어 환경이 열악한 국내에 머무르다 미국 프로 무대에 도전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골프 환경이 좋은 미국에서 적응력을 갖추자는 생각이었다. 미국 투어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어 능력도 중요하다는 판단이 더해졌다. 박인비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LPGA 2부 투어를 거쳐 LPGA에 입성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해 2013년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박인비의 골프 유학 모델도 이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뉴질랜드선 남녀 혼성 대회 뛰기도
이정현은 국내를 거점으로 하면서도 수시로 해외 도전에 나선다는 점에서 ‘하이브리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7세 때 골프를 시작한 이정현은 초등학교 3학년 말 뉴질랜드로 골프 유학을 떠나 1년 머물고서 귀국해 5학년 때 주니어 상비군에 뽑혔다. 뉴질랜드 유학 시절에는 컴컴한 밤 연습장에서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공을 비춰가며 샷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자 연습장 측에서 이정현을 위해 라이트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그 뒤로 매년 3개월씩 뉴질랜드로 훈련을 떠난다. 2019년에는 아버지와 자동차로 뉴질랜드 남북 섬의 시합 투어를 다니는 ‘골프 유목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기희씨는 “뉴질랜드는 선수층이 한국보다 얇기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치는 시합도 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많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번 포르투갈 원정은 어땠을까? 애초 8개 대회에 참가할 생각으로 떠났으나, 1월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대회가 거의 열리지 않았다. 1월 리스본에서 열린 아마추어 대회 포르투갈 인터내셔널 레이디스 아마추어 챔피언십 한 개 대회를 뛰고 알그레브로 돌아와 2월부터 미니투어 4개 대회를 소화했다. 프로에게는 참가비 300유로(약 41만원)를 받는데 아마추어인 이정현은 203유로(약 27만원)씩 냈다고 한다. 여자 선수는 이정현 한 명뿐이었다. 티잉 구역은 남자 선수들과 같은 곳을 이용하거나 한 칸 앞에서 치도록 배려해줬다. 미니투어이다 보니 정상급 선수들은 거의 참가하지 않는다. 그래도 100여 명 성인 남자 골퍼들과 경쟁해 2등을 한 번 하고 6등을 두 번 했다.
훈련은 유러피언 투어가 열렸던 36홀 규모의 몰가도 골프장과 링크스 코스인 27홀 규모의 파마레스 골프장을 번갈아 가며 했다. 몰가도 골프장은 명문인데도 1년 멤버십 비용이 850유로(약 116만원)로 라운드와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오전 7시 15분쯤 해가 떠서 오후 6시 해 질 무렵까지 골프장에서 훈련했다. 두 달 빌린 아파트 바로 앞이 해변이어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정현은 매일 아침 5㎞씩 모래사장을 달렸다. 지난해 치러진 올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탈락한 아쉬움도 털어낼 수 있었다. 워낙 어린 나이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정현은 지난 1년간 성적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샷이 흔들리는 아픈 경험을 했다.
이정현은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간 곳이었지만 한 달만 더 있다 가면 안 될까 싶을 정도로 모든 환경이 좋았다”며 “어려서부터 국내와 해외를 겸하는 생활에 지금은 익숙하다”고 했다.
이정현은 2월 28일 귀국해 1주일간 자가격리를 거치고 3월 9일에는 미국 오거스타로 떠났다. 오거스타 인근 세이지 밸리 주니어 인비테이셔널에 세계 각국의 아마추어 유망주들과 나란히 초청받아 1주일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대회를 뛰었다. 그리고 3월 말과 4월 초에 걸쳐 오거스타내셔널 위민스 아마추어(ANWA)에 참가하고 귀국했다.
이정현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하다는 소리를 듣는 국내 아마추어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국내용 모드’ 스위치를 켰다. 잠시 후 다시 떠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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