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72>
세계 지배한 스포츠 왕조에서 배우는 교훈 <4>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오후 6시부터 인도네시아의 마을 공터와 도시의 골목은 거대한 야외 배드민턴장으로 변한다. 주말에는 가족끼리 배드민턴을 즐기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배드민턴은 인도네시아라는 국가를 전 세계에 알린 스포츠다. 국제무대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던 배드민턴은 인도네시아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가 올림픽에서 획득한 금메달 8개는 모두 배드민턴 종목에서 나왔다.
이번 기획을 함께한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한 종목의 스포츠 왕조는 국가의 경제적인 요인이나 인구 등 외형적 요소보다는 국가적 자긍심과 뿌리 깊게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2020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765달러(한국 3만1881달러), 인구는 2억7240만 명(한국 5125만 명)이다.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인도네시아의 그레이시아 폴리-아프리야니 라하유 조가 중국의 천칭천-자이판 조를 세트 스코어 2 대 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국민에게 ‘생일 선물’을 선사한 선수들을 축하해줬다.
이 두 선수는 각각 34만7000달러(약 4억2000만원)의 상금과 미트볼 가게, 다섯 마리의 소를 국가로부터 받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더라도 일단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면 한 달에 2000달러(약 24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이는 인도네시아인 평균 월급의 10배 정도 되는 금액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배드민턴은 가난과 불평등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마술 지팡이’나 다름없다.
배드민턴은 인도네시아의 국민 스포츠다. 배드민턴 클럽은 1만여 개에 이르고 그중 엘리트 선수를 길러내는 클럽만 따져도 3500개가 있다. 배드민턴은 인도네시아의 스포츠 종목 중 유일하게 국립 트레이닝 센터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가 배드민턴 왕국이 된 데는 배드민턴을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의 노력이 깔렸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은 배드민턴을 통해 토착민들과 갈등을 이겨내고자 했다.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1945~67년) 정권 당시 배드민턴 선수 출신으로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렸던 딕 수르디만은 중국계와 토착민으로 구분돼 있었던 배드민턴 기구를 하나로 통합했다. 수르디만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사이에서 배드민턴이 오랫동안 성행했고 그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300여 개가 넘는 민족이 함께 살고 있어 사회 통합을 이루기 어려웠던 인도네시아 상황을 고려하면 수르디만의 이 결정은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왕조 탄생의 초석이 됐다.
수카르노의 배드민턴 육성 정책은 1959년 열매를 맺었다. 인도네시아는 1959년 남자 배드민턴 국가대항전인 토머스 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배드민턴 열풍이 불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전영(全英) 오픈 배드민턴 대회 남자 단식 8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인도네시아의 국민 영웅 루디 하르토노가 배드민턴 라켓을 잡은 것도 1959년 토머스 컵 대회 우승 이후였다. 루디 하르토노는 “토머스 컵에서 인도네시아가 우승을 차지하고 나의 아침은 매일 배드민턴과 함께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인도네시아의 1959년 토머스 컵 우승 이후 배드민턴을 이끈 것은 중국계 인도네시아 부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배드민턴 클럽으로 전국의 유망주들을 불러들여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운영하는 배드민턴 클럽에는 주로 중국계 유망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최대 인종인 이슬람계 자바인과 말레이계 인도네시아인에게도 클럽의 문호를 개방했다. 또한 배드민턴 클럽에서 모든 선수가 종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와 같은 배드민턴 클럽의 포용 문화 덕분에 인도네시아인은 인종과 관계없이 배드민턴을 진정한 ‘국민 스포츠’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배드민턴이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인도네시아는 무려 5개의 메달(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을 획득했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도 이때 나왔다. 수전 수산티의 여자 단식 금메달과 그녀의 남자 친구였던 알란 부디쿠스마의 남자 단식 금메달은 인도네시아 배드민턴의 금자탑이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배드민턴 종목에서 올림픽 때마다 적어도 1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올림픽 정식종목 시대 이후 인도네시아 배드민턴은 중국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계 최강 자리를 내어줬다. 중국은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하에 이 종목 유망주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그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 부분은 인도네시아의 국가대표 배드민턴 선수 대부분은 중국계였다는 점이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 선수가 배드민턴을 잘할 수 있다면 중국 선수도 잘할 수 있다는 일종의 믿음이었다.
이미 ‘약수터 운동’이었던 배드민턴을 1980년대부터 전략 종목으로 키우고 있던 한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배드민턴 남자와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 삼국지가 펼쳐지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중국이 배드민턴 금메달 5개를 모두 싹쓸이했다.
2012년 노메달 수모 후 극적 반전
인도네시아 배드민턴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노메달’의 수모를 당하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협회는 인적 쇄신을 단행했고 금융계 인사이자 인도네시아 상공부 장관이었던 기타 위르자완이 협회의 수장이 됐다. JP모건 인도네시아 지사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던 위르자완은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들의 강한 동기부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월급은 물론 국제대회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 금액을 대폭 인상했다. 그는 협회가 기업 스폰서십을 통해 벌어들이는 금액의 90%를 선수에게 제공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꿨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대한 포상금도 늘어났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하는 기간에도 ‘홈 스쿨링’ 제도를 도입해 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처럼 복지혜택을 강화하는 한편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발생한 선수들의 훈련장 이탈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규율을 강화했다.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 전설인 루디 하르토노와 수전 수산티 등을 협회로 불러들여 직접 현역 국가대표 선수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혁신은 달콤한 결과로 돌아왔다. 인도네시아는 전영 오픈과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하더니 2016년 리우 올림픽 배드민턴 남녀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여자 복식 금메달을 획득했다. 중국이 등장하자 한국 배드민턴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혁신에 나섰던 인도네시아 배드민턴은 다시 살아났다.
한국 여자 골프는 골프의 올림픽 정식 종목 복귀와 함께 세계 각국의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 LPGA투어로 몰려들면서 지배력이 약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전문가들은 KLPGA투어가 주니어 골퍼 후원을 비롯해 국제 경쟁력 있는 선수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코스 세팅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 아시아 선수는 물론이고 미국 선수들에게도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자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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