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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학수기자의 올댓골프]

부친 이어 9년 임기 마친 허광수 대한골프협회장


허광수 대한골프협회 회장이 선친이 지은 경기도 성남 남서울 골프장에서 골프인생 60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광수야, 용돈 벌러 가야지~.”

아버지는 이렇게 달콤한 말로 새벽마다 초등학생 아들을 깨워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부근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매일 새벽 6시면 작고 단단한 하얀 공들을 담은 바구니와 쇠막대를 들고 나타나는 부자의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무얼 하려고 저러나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6.25 끝나고 1년밖에 되지 않은 1954년이었다.

맨땅에서 아버지가 저편으로 서른 개 남짓 공을 치면 아들이 잽싸게 공을 주워 와 치기 좋게 놓았다. 클럽을 냅다 휘두르면 ‘땅!’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로 치솟아 날아가는 하얀 공이 마술처럼 마음을 끌었다.

지난주 경기도 성남 남서울 컨트리클럽에서 만난 허광수(삼양인터내셔날 회장) 대한골프협회 회장은 60년도 더 지난 일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그렸다. ‘남서울 칸트리 구락부’란 옛 명칭이 골프장 표지석 등에 아직 남아 있는 이곳은 1970년 그의 부친인 고(故) 허정구(1916~1999년) 전 삼양통상 회장이 지었다. 맨땅에서 골프와 인연을 맺은 이 부자는 대(代)를 이어 9년씩 대한골프협회장을 지내며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 한국 골프를 견인했다.

다음 주 대한골프협회장 임기를 마치는 허 회장은 ‘아버지와 아들, 대를 이어 사랑한 골프 이야기’란 제목을 붙인 사진첩을 들고 나타났다.

1959년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에서 준우승한 고 허정구 삼양통상 회장(왼쪽 둘째)이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과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대한골프협회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친이 상을 받는 사진도 보입니다.

“선친은 1959년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하셨어요. 그때는 대통령배로 열렸는데 이 대통령이 직접 시상할 정도로 관심과 애정이 많았지요. 학창 시절 아이스 스케이팅과 복싱을 한 선친은 1년 만에 70대 타수를 기록하며 아마추어 고수가 되셨는데, 그때 준우승에 그친 걸 아쉬워하셨던 모습이 제가 골프를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전쟁 직후인데 골프가 금기시되지 않았나요.

“오히려 나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정부에서 골프 할 수 있는 여건을 서둘러 만들어줬다고 해요. 당시 아버지는 삼성물산에서 근무하셨는데, 이병철 회장께서 외국 사업가들과 교류하려면 골프를 배우는 게 좋겠다며 클럽을 선물하셨답니다.”

이들이 처음 골프를 익히던 당시 한국에는 정규 18홀 골프장이 딱 하나 있었다.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서울컨트리클럽이다. 당시 지명을 따 ‘군자리 골프장’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영친왕 하사금으로 지은 이 골프장을 1950년 복원했으나 한 달 만에 6·25로 폐허가 되자 전쟁이 끝나고 1년 만인 1954년 전광석화처럼 다시 개장했다. 1953년 11월 11일 서울컨트리클럽 창립 총회 개회 인사에서 발기인 총대표 이순용 외자청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자유 진영 국가치고 골프장을 하나도 갖지 않은 나라가 없다. 골프는 심신을 단련하는 스포츠이면서 고급 사교와 국제 간 외교에도 큰 몫을 한다. … 이승만 대통령이 골프장 건설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제게 대임을 맡기셨다.”

이 대통령은 특히 휴일이면 주한 미군 장교들이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골프를 즐기고 오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주권국가로서 골프장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독려했다고 한다. 1954년엔 제1회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를 만들어 직접 시상도 했다. 대통령 자신은 골프를 하지 않았지만, 안보와 경제를 위해 골프장을 짓고 선수를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첫 대회에 김성곤씨 등 당대 재력가들과 외국인 20여 명이 출전했다. 기업인이 골프를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진주의 만석꾼 부자이자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허만정 선생의 부탁으로, 허만정의 큰아들 허정구는 삼성물산에 합류해 전무와 사장을 거쳤고, 삼양통상을 차려 독립한다.

1974년 관악CC에서 열린 대통령배 제21회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 트로피를 든 허광수(오른쪽)와 트로피를 수여한 아버지 허정구 당시 대한골프협회부회장. /대한골프협회

–그때 부자가 함께 골프를 하게 됐군요.

“저는 나중에 시작했어요. 중3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 컨트리클럽 연습장에 갔다가 처음 드라이버를 쳐 봤는데 아주 잘 맞았어요. ‘너도 연습을 해봐라’ 하며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해요.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아이스하키를 주로 했어요. 큰 부상을 당한 뒤 본격적으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결국 아버지의 준우승 ‘한'을 풀어드렸죠?

“제가 1974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 선친이 대한골프협회 부회장(대회 본부장)이셨어요. 아버님이 우승컵을 주시면서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때 사진에서 밝게 웃고 계신 모습으로 보아 내심 자랑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 허 회장의 애칭은 ‘미스터 골프’와 ‘캡틴’이었다. 열성적이고 친화력이 뛰어나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와 한국골프장경영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의 골프 실력과 인프라는 대만과 일본, 필리핀에도 한참 뒤지는 수준이었지만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 회장을 지냈다. 세계 골프의 요람으로 통하는 영국의 R&A(로열 앤드 에인션트 골프클럽) 한국인 첫 회원이기도 하다.

1976년부터 대한골프협회장을 맡아 3연임을 하면서 한국 골프의 초석을 다졌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 골프 경쟁력의 근간으로 부러워하는 ‘대표팀 상비군 제도’가 이때 만들어졌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을 발굴해 마음껏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풍부한 국제 대회 경험을 쌓게 해주는 시스템. 골프장과 훈련 시설이 부족한 한국에서 우수한 선수가 쏟아진 배경이 됐다.

박세리를 비롯해 박인비, 김세영, 고진영, 임성재, 강성훈, 김시우 등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와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활약하는 선수 대부분이 이 과정을 거쳤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임영선 대한골프협회 고문은 말했다. “그땐 돈이 없어 한국오픈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던 미천한 단계였어요. 골프 선수가 너무 없으니 협회가 직접 키워보자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엔 대학 야구부 학생들을 골프로 전향시켜도 보고, 프로 테스트에서 떨어진 친구들에게 다시 기회를 줘보기도 했죠. 결국 어린 선수들을 키우는 게 정답이란 생각에 대표팀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상비군으로 확대한 겁니다.”

아들 허광수 회장은 아버지 뒤를 이어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 회장과 대한골프협회장을 맡았다. 한국인 2호 R&A 회원도 됐다. 그가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 회장으로 있던 2009년 세계 골프클럽의 양대 산맥인 미국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 영국의 R&A와 공동 주관으로 아시아태평양 아마추어 챔피언십이 탄생했다. 그 대회 챔피언은 오거스타 내셔널이 주최하는 마스터스 출전권을 받고, 준우승자는 R&A가 주최하는 디오픈 예선 파이널 시리즈에 나갈 수 있었다. 마스터스 출전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골프 로또’가 걸린 이 대회는 아시아 골프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대한골프협회장 재임 중이던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116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복귀한 여자 골프 금메달을 박인비가 거머쥐었다.

–부친이 준우승하고 본인이 우승까지 한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후원하고 계시지요?

“올해 68회로 아마와 프로를 통틀어 국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지요. 2003년부터 한국 골프에 공헌한 선친을 기리기 위해 허정구배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한국은 여자 골프가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남자 골프도 그 못지않은 가능성이 있어요. 김경태·노승열·김비오·이수민·김한별 등이 이 대회 우승을 통해 이름을 알렸어요.”

대회 주최와 별도로 허 회장이 두 형(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과 함께 매년 이 대회에 1억원씩 주니어 육성 장학금을 낸 게 15억원가량이다.

2016년 골프인의 밤 행사에서 리우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박인비(오른쪽)와 박세리 감독에게 감사패를 수여하는 허광수 대한골프협회회장.

–제일 인상에 남는 선수가 누군가요.

“저도 최경주와 박세리 선수를 꼽아요. 최경주 선수가 2004년 마스터스에서 3위를 하고 한국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을 때 마음이 뭉클했어요. PGA 투어 진출 계획을 세우고 부인과 함께 3년 전부터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공부를 해도 잘 안 늘어서 ‘나는 열심히 골프를 할 테니, 영어 공부는 당신이 해주길 바라오’라고 부탁했다고 해요. 웃음이 터졌지만 얼마나 간절했고 진심이었는지 느껴지더군요. 박세리 선수는 한국 골퍼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어요. 리우에 이어 도쿄올림픽에서도 최경주와 박세리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은 무슨 기술을 가르쳐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 아니에요. 세계 무대의 긴장을 먼저 이겨내 본 두 선수의 존재 자체로 후배들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골퍼를 만나보셨는데 어떤 선수가 성공하던가요.

“김경태와 전인지, 이정은 등 제가 협회장을 할 때 주요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보면 어려운 형편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던 선수들이에요. 외국 선수로는 로리 매킬로이가 생각납니다. 한국오픈에 3차례 나왔는데, 만찬을 하다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뜨더군요. 내일이 본대회니 그렇겠구나, 생각했는데 퍼팅 그린에서 연습하고 있더라고요. 결국 챔피언을 만드는 힘은 노력입니다.”

–최근 2030 젊은 세대, 특히 여성 골퍼가 늘고 있습니다.

“열네 클럽을 활용하는 골프는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스포츠입니다. 힘이 부족해도 지혜와 기술로 극복할 여지가 많아서 묘미가 있죠. 넓은 대자연에서 개성을 발산하며 즐기는 젊은 여성 골퍼들의 등장은 한국 골프가 더욱 건강하게 발전할 기회가 될 겁니다. 골프 업계에서도 문턱을 과감하게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올림픽 정식 종목이고 골프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는데도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한국에서 여전히 사치성 운동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는 게 아쉬워요.”

나이키 공동 창업자인 필 나이트가 방한했을때 함께 찍은 사진. 뒤에 선글래스를 낀 이가 필 나이트.

–골프 덕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들어갔고, 나이키 설립자인 필 나이트와도 친구가 되셨죠.

“아이스하키와 골프 국가 대표를 한 경력이 도움됐어요. 처음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갔을 땐 1970년대 초반이니 한국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어요.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였고요. 72년에 졸업할 때까지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2년 동안 가장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으로 졸업식 때 학교를 상징하는 기를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골프가 큰 도움이 됐지요. 스탠퍼드에는 미국 100대 골프 코스에 들어가는 유명한 코스가 있는데, 제가 골프를 잘 하니 다들 놀라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골프를 하느냐’ ‘어떻게 그렇게 잘 하느냐’며 백인 친구들이 따라붙더군요. 그렇게 가까워진 친구 하나가 선배 중에 나이키를 창업한 필 나이트가 있다고 소개해줬고, 여덟 살 위인 필 나이트와 친구가 됐지요. 사업으로도 큰 인연을 맺어요. 나이키 OEM(주문자 위탁 생산)을 내게 부탁했으니까. 전 세계에서 파는 나이키 신발의 80%를 한국이 만들던 때도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인데 스탠퍼드까지 가서 힘들게 공부할 이유가 있었나요?

“아버지께서 ‘두 형은 착실히 공부하니 너는 프로 골퍼를 해도 좋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세계적 선수가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스탠퍼드에 승부를 걸었죠. 첫 수업이 국제경제학이었는데 지금도 잊지 못해요. 에든버러에서 온 룸스덴 교수가 세계 최빈국 5곳을 적으면서 마지막으로 한국을 꼽았어요. 제가 골프도 잘 하고 그러니까 한국은 꽤 살 만한 나라로 알던 친구들이 깜짝 놀랐지요. 영어는 자신이 없었지만, 손을 들고 ‘한국은 5개년 경제 계획도 성공하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옛날 자료를 가지고 수업하는 건 곤란하다’고 했어요. 그래도 교수가 시큰둥하기에 제가 다시 항의하고, 친구들도 팩트가 아닌 걸 가르치면 안 된다고 주장해 결국 정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표현으로 ‘금수저’여서 이만한 위치에 오른 건 아닐까요.

“IT 업체를 꾸리며 재계 순위에 오른 김범수나 김택진, 김정주 같은 분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제가 아버지의 큰 도움과 후광으로 오늘에 이른 건 사실이지만,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았다고 생각해요. 시험을 거쳐 진학한 경기고와 고려대 시절 아이스하키 국가 대표와 골프 국가 대표를 했습니다. 사업과 골프, 공부 모두에 최선을 다하면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건 자부할 수 있어요.”

–가정 교육은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저는 진주에서 서울로 초등학교 때 전학 왔어요. 당시엔 중학교부터 입시가 있어서 치맛바람 같은 게 있었는데, 어머니는 일절 학교 근처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너희만 공부 열심히 하면 되는데 내가 뭣 때문에 학교에 가나’ 그러셨죠.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바쁘시긴 했지만 자식들한테 너그러우셨고, 어머니도 뭘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스스로 판단해서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하라'고만 하셨고 형제간 우애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지요.”

아시아태평양골프연맹 회장 재임중이던 2009년 아시아아마추어챔피언십 첫 대회때 오거스타 내셔널 빌리 페인(왼쪽 둘째) 회장과 R&A 피터 도슨(왼쪽 첫째) 회장과 함께./대한골프협회

허 회장은 ‘프로 잡는 아마추어’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 아마골프선수권 우승 외에 한국오픈 아마추어 베스트, 신한동해오픈 아마추어 베스트로 트로피를 3개 받았다. 베스트 스코어는 7언더파 65타. 남서울 CC 고문인 최상호 프로는 “한번 목표를 정하면 물고 늘어지는 프로 같은 근성이 강하다”며 “지금도 마음먹고 치면 5차례 라운드 중 2차례는 에이지 슈터(자기 나이보다 적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골퍼)를 할 실력을 갖고 계신다”고 했다. 클럽 챔피언을 5차례나 하며 아마 고수로 통했던 고(故)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도 “허광수와는 내기해서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다.

–같이 라운드한 사람들이, 자세는 약간 주저앉는 듯 엉성한데 빈틈없는 골프를 한다고 평하더군요. 골프 잘 하는 비결이 있나요.

“무조건 노력이죠(웃음).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는 6개월마다 샌드웨지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벙커 연습을 많이 했어요. 핀을 보고 칠 수 있는 공격적 경기를 하려면 그린 주변 벙커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지 말아야 해요. 벙커에 들어가도 점수를 잃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니 아이언 샷도 더 정확해졌어요. 프로의 스윙이 멋있다고 따라 하지 말고 자신만의 간편한 스윙을 만드는 게 최선입니다.”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이란 책에서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릴 적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부친 박목월 시인의 따뜻한 손길을 그린다. 지휘자 금난새는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이란 책을 통해 먼저 음악의 길을 걸었던 부친의 삶과 음악 이야기를 전한다. ‘아버지와 아들, 대를 이어 사랑한 골프 이야기’란 제목을 단 허 회장 사진첩에서도 그 손길이 느껴졌다.

허 회장은 “한국 골퍼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 같다”고 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는데도 우리 국민은 잘살아봐야겠다, 선진국이 돼보자는 신념이 엄청났어요. 한국보다 임금이 싸고 여건이 좋은 나라가 많았지만 이만큼 성장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지요. 코로나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간절한 노력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경험한 역사를 바탕으로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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