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오크몬트 컨트리클럽(파70)에서 막을 내린 제125회 US오픈 골프 대회.
전 세계 정상급 선수 156명이 나흘간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리더보드에는 단 한 명의 언더파 스코어만 남았다. 주인공은 1언더파 279타를 기록한 JJ 스폰(35·미국). 2위 로버트 매킨타이어(스코틀랜드)는 1오버파 281타였다. 세계 정상급 골퍼를 무릎 꿇린 오크몬트가 진정한 승자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US오픈은 4대 메이저 대회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코스 세팅으로 악명 높다. 긴 전장, 좁은 페어웨이, 깊고 억센 러프, 빠르고 단단한 그린이 US오픈을 상징하는 코스 세팅의 기본 사양이다. 이런 US오픈을 오크몬트는 올해로 10번째 개최했다(1927, 1935, 1953, 1962, 1973, 1983, 1994, 2007, 2016, 2025). 가장 많다. 앞으로 2033년, 2042년, 2049년에도 개최가 예정돼 있다. 저스틴 토머스(미국)는 “오크몬트는 원래 코스 자체로 US오픈 수준이어서 조직위가 따로 손볼 게 없다”고 했다. 올해도 개미허리처럼 폭이 좁은 페어웨이에 러프 길이 12.7㎝ 이상으로 조성돼 많은 선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린에선 잔뜩 겁을 먹은 채 퍼팅하는 선수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오크몬트는 정상급 선수가 더블보기, 트리플보기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골프 사디스트’의 본거지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1 J. J. 스폰이 6월 15일 US오픈 최종 라운드 18번 홀에서 20m 버디 퍼트 성공 후 그린에서 우승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2 제 125회 US오픈 2위인 샘 번스가 같은 날 최종 라운드 11번 홀에서 세 번째 샷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 AFP연합 3 세계 1위 스코티 셰플러가 US오픈 골프 대회 최종 라운드를 마친 후 18번 그린에서 이마를 닦고 있다. /사진 AP연합
정상급 선수도 더블보기, 트리플보기
2007년 앙헬 카브레라(아르헨티나)는 5오버파로 우승했다. 당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가 6오버파 공동 2위였다. 2016년 더스틴 존슨이 4언더파로 우승했는데, 당시 많은 비가 내려 그린이 부드러웠다는 평이 있었다. 올해 대회도 4라운드 도중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유일한 언더파도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경기 내내 고문을 당하듯 흔들리다 평정심을 잃은 선수가 속출했다. 마스터스에서 ‘커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 대회 모두 우승)’을 이룬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도 그중 하나였다. 2라운드 17번 홀(파4)에서 티샷 실수를 한 뒤 클럽을 내던져 티 마커를 부쉈다. 간신히 컷을 통과한 그는 공동 19위(7오버파)로 대회를 완주한 것을 위안 삼았다. 2019년 디오픈 챔피언 셰인 라우리(아일랜드)는 그린에서 마크하지 않고 공을 집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등 17오버파로 2라운드 만에 짐을 쌌다. “빌어먹을 골프장(F*** this place)”이라는 탄식과 함께.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는 나흘 내내 언더파를 기록하지 못했다(73·71·70·70타). 보기 17개, 더블보기 1개를 범하며 프로 데뷔 이후 가장 많은 보기(이상) 스코어를 기록했다. 최종 4오버파 284타로 공동 7위에 머물렀다. 2022년 2월 이후 승률 25%로 16승을 올리며 “전성기 우즈에게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셰플러는 1라운드 후 “정신적으로 이렇게 힘든 하루는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
'징벌적 코스'의 상징 오크몬트
또 한 번 ‘지옥의 코스’임을 증명한 오크몬트는 1903년 개장했다. 1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코스는 미국의 내셔널 히스토릭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다.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의 철강 사업가 헨리 파운스(1856~1935)는 40대에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에게 회사를 매각해 엄청난 부를 일궜다. 스코틀랜드 출신 카네기는 그에게 골프를 알려줬다.
빠른 속도로 실력이 향상된 파운스는 기존 골프장이 너무 쉽다고 느꼈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골퍼를 테스트할 수 있는 코스를 만들기 위해 그는 직접 골프장 설계에 나섰다. 1903년, 150명의 인부와 24마리의 노새를 동원해 12홀을 조성했고, 이듬해 나머지 6홀을 지으며 오크몬트가 완성됐다.
파운스의 설계 철학은 단순 명쾌했다. 그는 “골프장은 ‘아름다움’ 경연 대회가 아니다. 서투른 자, 줏대 없는 자, 변명에 익숙한 자는 물러가라. 잘 못 친 샷은 돌이킬 수 없는 샷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크몬트에는 연못도, 나무도 없다. 과거엔 나무가 있었지만 개·보수를 통해 모두 제거했다. 대부분의 홀이 직선형이며 겉보기에 특별한 장애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오크몬트는 징벌적 코스의 상징이 됐다.
그린 몇 개를 합쳐 놓은 듯 크고 굴곡이 심한 그린은 ‘유리알 그린’으로 유명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보다 더 까다롭다.
2011년 마스터스 챔피언 찰 슈워젤(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보다 훨씬 더 어렵다. 오거스타는 그린의 구름이 한 방향으로 일정한데, 여기엔 큰 경사에 네 개의 브레이크가 있다”면서 “그린 스피드를 제대로 파악하기 정말 어렵다”고 했다. US오픈의 평균 그린 스피드가 4.27~ 4.42m인데 오크몬트는 가장 빠른 편으로 알려졌다. “공을 마크한 동전이 미끄러진다”는 농담까지 나온다.
그린 속도 측정 도구인 ‘스팀프미터’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1935년 오크몬트에서 열린 US오픈을 관전하던 아마추어 골퍼 에드워드 스팀프슨은 당대 최고의 선수 진 사라센(미국)이 퍼팅한 공이 그린을 벗어나는 것을 보고 그린 속도 정량화 필요성을 느껴, 막대형 측정기 스팀프미터를 고안했다. 그린 스피드는 홈이 파인 알루미늄 막대(91㎝)인 스팀프미터를 그린과 20도 각도에서 볼을 놓아 그린에서 굴러간 거리로 표시한다.
오크몬트를 상징하는 ‘교회 의자(church pew)’ 벙커도 악명 높다. 길이 100m, 폭 36m의 거대한 벙커 안에 13개의 잔디 둔덕이 교회 긴 의자처럼 줄지어 놓여 있다. 이 벙커는 3번과 4번 홀 사이의 페어웨이에 자리 잡았다. 이 벙커에 볼을 빠뜨린 골퍼는 자신의 실수를 참회하는 심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악마의 발톱’으로 불리는 배수로도 숨어있다. 깊이 1m 이상 되는 이 배수로는 페어웨이 옆이나 코스 중간을 가로지르며, 눈에 잘띄지 않아 방심할 경우 볼이 빠지기 쉽다.
US오픈 역사에 길이 남을 20m 버디 피트
이번 대회 챔피언 스폰은 어떻게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을까. 3라운드까지 선두였던 샘 번스(미국)에게 1타 뒤진 공동 2위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한 그는 전반 9홀에서 다섯 개의 보기를 쏟아냈다. 경기 중간 쏟아진 폭우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1시간 37분간 중단된 시간에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미국 아버지의 날이다.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어릴 적 꿈꾸던 US오픈 무대에서 경기하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맥스 호마(미국)가 전해준 타이거 우즈의 조언이 떠올랐다고 한다. “US오픈에서는 무리해서 스코어를 줄이려 하지 말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기회가 온다.”
마음을 비운 그는 후반 9홀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12번 홀(파5) 버디를 시작으로 7개 홀에서 버디 4개, 보기 1개로 3타를 줄였다. 특히 17번 홀(파4)에서는 ‘원 온’에 성공해 투 퍼트로 버디를 낚으며 단독 선두로 나섰고, 18번 홀(파4)에선 20m 거리의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US오픈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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