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에 대한 부담과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골퍼 같았다. 잰더 쇼플리(31·미국)가 7월 21일(이하 현지시각) 영국 스코틀랜드 사우스 에어셔의 로열 트룬 골프클럽(파71·7385야드)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제152회 디오픈(총상금 1700만달러) 최종 4라운드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압도적이란 표현이 딱 어울였다.
쇼플리는 보기 없이 버디 6개를 뽑아내는 무결점 경기를 선보이며 6언더파 65타를 쳤다. 전반 두 개, 후반 네 개의 버디에 성공했다. 우승에 도전하는 골퍼에게 가장 긴장될 수밖에 없는 ‘일요일의 후반 9홀’에 오히려 최고의 경기력을 폭발시키는 집중력을 보였다. 최종 합계 9언더파 275타를 기록한 쇼플리는 공동 2위(7언더파)인 로즈와 빌리 호셜(38· 미국)을 2타 차이로 제치고 5월 PGA챔피언십에 이어 두 달 만에 두 번째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시즌 메이저 2승은 2018년 브룩스 켑카(미국)가 US오픈과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후 6년 만이다. 우승 상금 310만달러(약 43억원)와 우승 트로피 ‘클라레 저그’를 품에 안은 쇼플리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졌다”며 “이제 올림픽 2연패와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도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올해 쇼플리의 나머지 메이저 대회 성적도 준수하다. 마스터스에서는 8위, US오픈에서는 공동 7위로 톱 10에 들었다.
‘준우승 전문가’란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쇼플리는 지난 5월 PGA챔피언십에서 4대 메이저 대회 사상 최다 언더파 스코어인 21언더파 263타로 메이저 첫 승리를 차지하고는 ‘우승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가 터득한 비결은 별것 아닐 수 있다.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쇼플리는 지금까지 180개 대회에서 우승 9번, 준우승 14번, 3위 9번, 5위 이내 44번을 기록했다. 우승보다 놓친 우승 기회가 훨씬 많았다. 메이저 대회에서도 2018년 디오픈과 2019년 마스터스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쇼플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골퍼가 됐다. 쇼플리와 디오픈 최종 라운드를 같은 조에서 경기한 백전노장 저스틴 로즈(44·잉글랜드)는 경기 후 이런 찬사를 남겼다. “이제 승리는 쇼플리에게 쉬운 일처럼 보인다. 드라이버샷과 아이언샷, 웨지샷, 퍼트까지 그는 모든 무기를 갖추고 있다. 가장 저평가된 건 표정을 읽을 수 없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한 정신력일 것이다.”
잰더 쇼플리가 7월 21일 디오픈 4번 홀에서 러프를 공략하고 있다. 쇼플리는 9언더파를 기록하며 2타 차로 우승했다. /UPI연합
임성재가 7월 21일 디오픈 골프 4일째 최종 라운드에서 14번 그린에서 버디를 성공시킨 후 기뻐하고 있다. /AFP연합
7월 21일 디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스코티 셰플러가 18번 페어웨이를 걸어 올라가고 있다. /로이터연합
‘우승 전문가’로 거듭난 쇼플리
쇼플리는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선수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헌신하고(commit) 실행하고(execute) 수용하라(accept)’는 삶의 모토를 심어줬다”며 “아버지는 내게 골프를 가르쳐준 스윙 코치이자 평생의 멘토다”라고 말한다. 쇼플리 아버지 슈테판은 독일 10종 경기 대표 출신이다. 팀 훈련 캠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한쪽 눈 시력을 잃으면서 올림픽 꿈을 접었다. 하지만 클럽 프로로 활동하며 아들을 PGA투어 선수로 키워냈다. 쇼플리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아버지 한을 풀었다.
디오픈 개 전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골퍼는 세계 랭킹 1위인 스코티 셰플러(28·미국)였다. 셰플러는 6월 23일 미국 프로골프(PGA)투어 트래블러스 챔피언십(총상금 2000만달러)에서 시즌 6승(통산 12승)째를 기록했다. 1962년 아널드 파머 이후 62년 만에 7월 이전에 6승을 거둔 선수다. 또 2009년 타이거 우즈 이후 처음으로 한 시즌에 6승을 거뒀다. 셰플러가 우즈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셰플러는 지난해 PGA투어 최초로 한 시즌 최다 상금(2101만달러)을 넘은 데 이어 올해는 그 기록도 넘어 2814만달러(390억원·7월 21일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쇼플리가 1586만달러(약 220억원)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셰플러는 올해 마스터스에서 두 번째 그린 재킷을 입었지만, PGA챔피언십 공동 8위, US오픈 공동 41위, 디오픈 공동 7위를 기록했다. 한 시즌 메이저 대회 2승으로 쇼플리가 6승을 거둔 셰플러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 골프계에선 메이저 대회 1승이 일반 대회 10승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쇼플리와 셰플러의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나란히 미국 대표로 참가하는 파리 올림픽 남자 골프와 1800만달러(약 240억원)의 보너스와 5년간의 투어 카드를 주는 PGA투어 플레이오프 최종 승자에게 주어지는 페덱스컵을 놓고 격돌한다. PGA투어 올해의 선수를 누가 거머쥘지도 관심이다.
한국 선수 6명 컷 통과 ‘대약진’
바다와 육지가 연결되는 땅, 링크스 코스(links course)에서 열리는 디오픈은 한국 선수에게 낯선 무대였다. 하지만 지난해 김주형(22)이 공동 2위에 오르며 역대 한국인 최고 성적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임성재(26)가 공동 7위로 톱 10에 올랐다.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의 링크스 코스는 한국 선수가 평소 경험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수시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달라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깊고 질긴 러프는 자칫 골프 클럽을 잘못 놓았다가는 찾기도 어렵다. 항아리 벙커는 그린이 아닌 반대편 페어웨이를 향해 쳐야 할 때도 있다. 한국 골프의 개척자인 최경주(54)는 2007년 디오픈에서 공동 8위에 올랐지만 4대 메이저 가운데 디오픈을 가장 까다로운 대회로 꼽았다. 최경주는 “한국의 산악 코스와 느낌이 비슷한 마스터스가 가장 친숙한 느낌이 든다”라고도 했다. 마스터스에서는 임성재가 공동 2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최경주도 3위를 비롯해 세 번 톱 10에 올랐다.
올해 디오픈에 한국 선수 8명이 참가해 6명이 컷을 통과했다. 임성재와 같은 조에서 경기한 안병훈(33)이 공동 13위(1오버파)에 올랐고, 한국 오픈 우승자로 디오픈 티켓을 딴 김민규(23)가 공동 31위(6오버파)에 올랐다. 3라운드 17번 홀(파3)에서 디오픈 사상 최장거리 홀인원 기록(238야드)을 세웠던 김시우(29)가 공동 43위(8오버파)로 마쳤다. 왕정훈(29)이 공동 60위(11오버파), 송영한(33)이 공동 72위(14오버파)였다. 김주형과 고군택(25)은 아쉽게 컷을 통과하지 못했다. 일본 선수 7명이 참가해 6명이 컷 탈락한 것에 비하면 한국 선수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한국 선수가 디오픈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경험의 폭이 쌓이면서다. 2017년부터 코오롱 한국오픈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는 디오픈 출전권이 주어지면서 링크스 코스를 경험한 선수가 국내에서도 늘었다. 한국의 현대차 브랜드인 제네시스가 3년째 후원하는 제네시스 스코티시 오픈도 디오픈이 열리기 전 스코틀랜드에서 열려 한국 선수가 링크스 코스를 경험할 기회가 많이 늘었다. 한국 골퍼가 디오픈 우승 트로피인 클라레 저그에 입맞춤하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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