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US여자오픈은 ‘그들만의 리그’에 심취해 있던 한국 골프의 국제 경쟁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충격적인 ‘사태’라는 평가다.
상위 10위에 한국 선수 이름이 사라진 것은 박세리 우승 직전 해인 1997년 이후 27년 만이었다. 김효주와 임진희가 공동 12위(4오버파 284타)로 이번 대회 한국 선수 중 순위가 가장 높았다.
US여자오픈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의 정상급 스타 선수인 박현경이 스윙 코치 이시우 프로에게 말했다. “지난주에 우승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네요. 베스트를 쳐야 US여자오픈 톱10이 될까 말까 하네요.” 박현경은 KLPGA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결승에서 이혜원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US여자오픈에서는 고전 끝에 공동 39위(11오버파 291타)로 마쳤다. 개미허리처럼 좁은 페어웨이에 깊은 러프, 단단하고 빠른 그린에서 고전하던 그는 마지막 라운드에 이븐파를 치며 적응한 모습을 보였지만 더는 라운드가 남아 있지 않았다. 큰 무대를 경험한 박현경은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겠다”고 했다.
박현경이 19일 강원 춘천시 라데나CC에서 열린 '2024 두산 매치플레이'에서 우승 확정 후 축하를 받고 있다./KLPGA이시우 코치는 전 세계 1위 고진영과 리디아 고를 비롯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의 강자인 박현경, 김수지 등의 스윙 코치를 맡고 있다. 해외에서도 이름이 높아 일본과 태국 등 외국 선수들이 그가 원장으로 있는 빅피쉬 아카데미가 있는 수원CC를 찾아와서 배우고 있다. 이 코치는 지난 6월 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컨트리클럽(파70·6379야드)에서 막을 내린 US여자오픈(총상금 1200만달러)에 함께 하는 선수들을 위한 조언을 위해 다녀왔다. ‘충격의 US여자오픈’에 대한 그의 관전기를 들어보았다.
US여자오픈은 1998년 IMF 위기로 고통받던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박세리의 ‘맨발 투혼’ 우승 신화가 이뤄진 한국골프의 성지다. 박세리를 포함해 한국 선수가 무려 11차례나 우승하고 40여명의 선수가 출전해 리더보드 상단을 한국 선수들이 차지해 ‘US 코리아 오픈’이라 불리던 곳이다. 하지만 올해는 US 재팬 오픈이 됐다. 20명이 참가한 한국보다 1명 많은 21명이 출전한 일본은 여자 골프 사상 최다 우승 상금인 240만달러(약 33억원)를 차지한 사소 유카(4언더파 276타)를 비롯해 시부노 히나코가 준우승(1언더파)을 했다. 공동 6위(2오버파) 후루에 아야카, 공동 9위(3오버파)인 일본 여자 프로골프(JLPGA) 투어 소속 다케다 리오와 고이와이 사쿠라까지 일본 선수 5명이 10위 안에 들었다. 태국도 5위(1오버파) 아르피차야 유볼과 공동 6위 (2오버파)아타야 티띠꾼, 위차니 미차이 등 3명이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 10위 선수들은 공동 3위(이븐파)인 미국의 안드레아 리와 앨리 유잉(이상 미국), 공동 9위(3오버파)인 호주교포 이민지였다.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LPGA투어 대회인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고진영(가운데), 리디아 고(왼쪽)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이시우 프로. /이시우 프로-현장에서 지켜본 소감은?
“US여자오픈은 가장 긴 역사와 가장 큰 상금규모를 자랑하는 대회다. 한국여자골프가 세계 최강의 명성을 얻은 것도 이 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상금 규모가 커지며 올해는 총상금 1200만 달러에 우승상금 240만 달러가 주어지는 여자골프의 슈퍼 이벤트가 됐다. 정작 이런 US여자오픈에서 한국 선수가 10등 안에 아무도 들지 못하고 힘을 쓰지 못하니 너무 안타깝다. 한국 선수들 경기력이 하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나왔지만 이번 대회는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말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골프에서 한국이 일본에 역전당했다.
“대회 코스를 보는 순간 한국 선수들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 주변 러프가 깊어서 섬세한 어프로치 실력이 중요했다. 그린이 단단하면서 경사가 심하고 정말 빨라서 퍼팅 능력도 중요했다. 한국 선수들의 샷 능력은 여전히 정상급이다. 하지만 평소 KLPGA투어에서 이런 러프와 이런 그린을 경험할 기회는 두세 대회를 빼고는 없다. 반면 일본은 평균적으로 한국보다 코스 세팅이 훨씬 어렵다. 이번 대회에 일본 선수가 21명, 한국 선수가 20명이 나왔다. 일본 선수들은 상위 10위에 든 5명 외에도 평균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한 수 위란 평가를 받았는데.
“한국이 한 수 위였던 시대는 한국 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이전에도 상위 20명 정도의 실력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 투어가 성장하면서 적극적인 해외 도전 정신이 사라졌고, 해외에 나가서 뛰면 선수들이 불이익을 받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경쟁을 안 하는데 경쟁력이 좋아질 수 없다. 세계 최강이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선수들 탓만 하기도 힘든 게 마음은 나가서 뛰고 싶은 선수들도 자칫하면 국내 상금도 놓치고, 오히려 적지 않은 벌금을 내야 하는 현실을 생각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 인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며 팬들도 후원사도 협회도 모두 만족해한다. 예전엔 LPGA 투어로 가는 등용문이었던 국내에서 열리는 LPGA투어 대회에도 선수들이 나서기 어려운 구조로 변했다. 이러는 사이 일본은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에 자극받아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는 정신이 강해졌다. 일본에서 열리는 LPGA투어 대회에 많은 일본 선수들이 참가할 뿐만 아니라 LPGA투어 주요 대회 성적과 상금을 일본 투어 상금 순위와 대상 포인트에 포함하고 있다.”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받은 느낌은.
“PGA투어는 이미 팀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이젠 LPGA투어도 선수 혼자 뛰던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대부분 주요 선수들이 스윙 코치와 트레이너는 기본이고 더 세분화된 조력자들을 포함한 팀을 만들어 움직이고 있다. 일본 선수들도 그런 경우를 자주 보았다. 이번 대회 코스는 넬리 코르다가 컷 탈락할 정도로 어려웠다. 고진영과 박현경, 김수지도 처음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 적응했다. 미국이나 일본은 선수와 코치가 대회 현장에서 함께 훈련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데, KLPGA투어는 대회장에서 코치가 선수들을 지도하는 게 어렵게 돼 있다. 학부형의 개입 때문에 시작된 규제였지만 지금은 글로벌 트렌드에서 한참 벗어난 이상한 모습이 됐다. 경쟁력을 저해하는 규제들을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한국 선수들이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KLPGA투어에서 뛰면서 자연스럽게 경쟁력이 생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한국 여자골프는 일본이나 태국 선수와 경쟁해서 예전처럼 이길 수 없다. 국내에서 우리끼리 서로 잘한다 해봐야 진짜 잘하는 게 아니다. US여자오픈 보고 큰일 났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당연하다. 정상급 선수들이 다 모이는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우승을 못하는 게 전혀 이변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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