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CNN의 아침 프로그램에 화상 출연한 40대 미국 골퍼가 “틴컵의 주인공과 비슷한 것 같다”는 진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활짝 웃었다. 그는 5월 22일 막을 내린 남자골프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인 PGA 챔피언십(총상금 1750만달러)에서 공동 15위에 올라 우승자 브룩스 켑카(33·미국) 못지않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클럽 프로(레슨 프로) 마이클 블록(46·미국)이다. 그는 “작은 도시 골프장 레슨 프로인 내가 3라운드에서는 저스틴 로즈와, 4라운드에서는 로리 매킬로이와 경기했다.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블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미션비에호의 아로요 트라부코 골프클럽의 헤드 프로다. PGA 챔피언십은 출전 선수 156명 중 20명 몫을 미국 내 클럽 프로에게 배분하는데 블록도 이를 통해 출전했다.
아무도 블록이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록은 어렵기로 소문난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오크힐 컨트리클럽(파 70)에서 1·2라운드 연속으로 이븐파 70타를 치며 공동 10위로 컷을 통과해 주목을 받았다. 3라운드에서도 이븐파를 적어내며 공동 8위로 올라선 블록은 최종 4라운드에선 PGA투어 23승(메이저 4승)을 거둔 스타 로리 매킬로이(34·북아일랜드)와 함께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매킬로이가 보는 앞에서 홀인원까지 만들어 냈다. 151야드 파 3홀인 15번 홀에서 블록이 7번 아이언으로 친 공이 덩크 슛을 하듯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블록은 “사실 공이 들어가는 걸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로리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팔을 벌리고 나를 껴안아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며 “매킬로이가 내게 (홀인원이라고) 5차례나 말해야 했다. 매킬로이가 내게 홀인원을 했다고 말해주는 건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고 했다. 블록이 홀인원을 하던 순간 캘리포니아주 미션비에호의 아로요 트라부코 골프클럽에 모여 블록을 응원하던 클럽 회원들과 마을 주민들이 환호하는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졌다.
블록은 이 대회 다섯 번째 출전 만에 처음 컷 통과를 하며 공동 15위(1오버파 281타)에 올라 상금 28만8333달러(약 3억8000만 원)를 받았다. 시간당 150달러(약 20만원)의 레슨비를 받던 그가 한 해 수입이 넘는 상금을 받게 된 것이다.
블록은 이 대회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선수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지난 4월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욘 람(29)은 PGA챔피언십 공동 50위에 머물렀다.
공동 15위는 PGA 챔피언십 역사에서 클럽 프로가 거둔 성적 중 역대 급이다. 1988년 제이 오버턴(미국)이 공동 17위에 오른 것이 최근 35년 사이에 유일하게 클럽 프로가 20위 안에 든 기록이었다. 블록은 15위까지 주어지는 내년도 PGA챔피언십 출전권도 확보했다.
PGA 챔피언십 공동 15위 덕분에 5월 26일 개막한 PGA투어 찰스 슈와브에 초청받은 그는 이번 주에 예약한 레슨을 모두 취소했다고 밝혔다. 그는 “레슨을 받기로 한 고객들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면서도 “아내가 레슨비를 올려받으라고 할 것 같지만, 더 받는 건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블록은 6월 시작하는 RBC 캐나다 오픈에도 초청됐다.
블록은 자신의 공에 ‘왜 안돼?(Why Not)’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경기한다. 그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었고, 앞으로의 삶이 전과는 같지 않을 거라는 묘한 느낌도 들지만 그건 좋은 쪽으로일 것이다. 멋진 일이다”라고 말했다. PGA 챔피언십이 끝난 5월 23일 발표된 세계랭킹에서 블록은 577위에 이름을 올렸다. PGA 챔피언십에 출전하기 전 3580위에서 한 번에 3003계단을 뛰어오른 것이다.
블록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PGA챔피언십의 역사 덕분이다.
지금은 세계 정상급 프로 골퍼가 되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사정은 딴판이었다. 당시 프로 골퍼들은 돈 많은 아마추어 골퍼에 의해 클럽에 고용된 ‘도우미’ 정도로 인식됐다. 그러자 ‘을’들도 단체를 만들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1916년 결성된 미국프로골프협회(PGA of America)다. PGA 오브 아메리카는 1968년 투어 프로 선수들의 조직인 PGA투어가 떨어져 나가기 전까지 각종 대회도 주관했다. 미국과 유럽이 벌이는 골프 대항전인 라이더컵은 지금도 PGA 오브 아메리카가 주관한다. 분리 이후 PGA 오브 아메리카는 골프장 관리와 운영을 담당하는 전문직 종사자와 골프 교습가의 단체로, PGA투어는 프로 대회와 여기 참가하는 직업 선수들을 관리하는 단체로 역할을 나누었다. PGA 오브 아메리카의 회원은 약 2만9000명으로 국내에 ‘클래스 A, PGA 멤버’라고 알려진 자격증은 PGA 오브 아메리카의 정규 교습가 과정을 이수하고 테스트를 통과한 이들에게 주어진다.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은 PGA 오브 아메리카에서 주관하는 대회여서 미국의 레슨 프로 20명이 매년 출전 자격을 얻고 있다. 참고로 4대 메이저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는 PGA투어와는 관계가 없다. 마스터스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US오픈은 USGA(미국골프협회)에서, 디오픈 챔피언십은 스코틀랜드의 R&A(로열 앤드 에인션트 골프클럽)에서 각각 주관한다.
PGA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는 무게 12.25㎏, 높이 71.12㎝의 ‘워너메이커 트로피’로 세상에서 가장 큰 트로피로 꼽힌다. 트로피 이름은 PGA 결성에 도움을 준 인물인 백화점 재벌 로드먼 워너메이커의 이름에서 왔다.
워너메이커와 프로 골퍼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나서 아마추어 골퍼들이 참가하는 US오픈이나 디오픈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대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PGA 챔피언십을 창설했다.
당시 워너메이커는 우승 상금 2500달러와 트로피를 기증했다. PGA는 자신들의 위상 재정립을 위한 상징으로 트로피를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한때 분실 소동을 겪었던 원본 트로피는 현재 플로리다에 있는 PGA 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1928년 제작된 ‘복제 트로피’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 ‘모셔진’ 원본 트로피에도 여전히 챔피언의 이름은 새겨지고 있다. 2009년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양용은의 이름도 남아 있다.
워너메이커 트로피는 너무 무겁고 큰 탓에 이와 관련한 촌극도 있었다. 2014년에는 우승자인 로리 매킬로이에게 트로피를 전달하면서 무게 탓에 윗부분의 뚜껑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고, 1997년 챔피언인 데이비스 러브 3세는 “트로피가 너무 무거워 어떻게 잡고 키스 세리머니를 할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악동’ 존 댈리는 1991년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트로피에 맥주를 채워 마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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