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미국에서 열린 미국 팀과 세계연합 팀의 골프 대항전 프레지던츠컵은 세계 골프의 변방이었던 한국 남자골프의 눈부신 도약을 알린 터닝포인트가 됐다.
미국과 세계연합 팀에서 각각 선수 12명이 출전하는 이 대회에 한국은 김주형(20)·임성재(24)·이경훈(31)·김시우(27) 등 4명이 출전해 세계연합 팀 선수 중 3분의1을 차지했다. 임성재와 김주형은 세계랭킹을 통해 자력으로 출전권을 얻었고, 이경훈과 김시우는 남아공 출신 트레버 이멜먼 단장이 추천했다. 2011년 호주 멜버른 대회에 최경주·양용은·김경태 등 3명이 참가한 적은 있지만, 한국 선수 4명이 동시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기에는 독특한 상황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주도하는 LIV 골프인비테이셔널 시리즈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미국프로골프(PGA)투어가 출전 자격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디오픈 우승자인 캐머런 스미스(호주)를 비롯해 호아킨 니만(칠레), 마크 레시먼(호주), 카를로스 오티즈, 아브라함 앤서(이상 멕시코) 등 주력 선수들이 빠졌다. 이런 위기 국면에서 ‘코리안 브라더스’는 세계연합 팀이 따낸 12.5점 가운데 7.5점을 합작하면서 대회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왼쪽부터)김시우, 임성재, 이경훈, 김주형
“한국 선수 네 명 헤라클레스 같은 활약”
1994년 프레지던츠컵이 출범한 이래 미국은 최근 9연승을 포함해 통산 12승 1무 1패라는 일방적인 결과로 끝났지만 한국 선수들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는 2022년 프레지던츠컵을 결산하면서 한국 선수들 덕분에 앞으로 세계연합 팀의 장래는 밝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 선수 네 명이 헤라클레스 같은 활약(Herculean contribution)을 해준 덕분에 세계연합 팀은 미국에 맞서 버틸 수 있었다. 그동안 호주, 남아공, 일본, 캐나다에 기댔던 세계연합 팀에 젊은 한국 선수들은 든든하게 의지할 만한 기반이 될 것이다.”
‘코리안 브라더스’의 상승세는 지난 10월 10일 끝난 PGA투어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에서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날 우승한 김주형과 함께 김성현이 공동 4위(20언더파), 지난해 이 대회 우승자였던 임성재가 7위(19언더파), 김시우가 공동 8위(18언더파)에 오르는 등 한국 선수 4명이 톱10에 올랐다. PGA투어에서 한국 선수 4명이 상위 10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이경훈이 공동 37위(12언더파), 안병훈이 공동 44위(11언더파)에 오르는 등 PGA투어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 6명이 모두 컷을 통과했다. 이들은 18번 홀에서 김주형을 기다리다 우승을 확정짓자 포옹하며 축하해줬다.
이들 ‘코리안 브라더스’는 박세리의 등장 이후 여자골프 인기가 남자를 압도하는 한국의 독특한 ‘여고남저(女高男低)’ 골프 문화에서 새롭게 한국 남자골프의 르네상스를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개척자’ 최경주가 PGA투어에서 처음 우승한 이후 서서히 축적된 남자골프의 에너지가 응축돼 폭발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10월 17일 발표된 남자골프 세계랭킹에서 김주형은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높은 15위에 올랐다. 2021년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일본의 마쓰야마 히데키는 19위다. 임성재가 20위, 이경훈이 42위, 김시우가 73위다.
특히 ‘코리안 브라더스’의 막내 김주형은 우즈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세계 골프의 블루칩으로 성장했다.
‘여고남저’ 탈피 남자골프 르네상스
김주형은 올해 8월 PGA투어 비회원 신분으로 참가한 윈덤챔피언십에서 2000년대생으로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첫 승리를 올린 데 이어 10월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에서 2개월 만에 2승째를 올렸다. 김주형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이후 26년 만에 21세 이전에 PGA투어에서 2승을 올린 선수가 됐다. 우즈는 1996년 이번 대회의 전신인 라스베이거스 인비테이셔널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2주 뒤 월트디즈니 월드 올드모빌 클래식에서 2승째를 올렸다. 당시 우즈의 나이는 20세9개월이었다. 김주형은 20세3개월이어서 우즈보다 6개월 정도 빨리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932년 랠프 굴달(미국)이 21세2개월에 2승을 올린 게 역대 최연소다.
메이저대회 15승을 포함해 PGA투어 최다승 타이인 82승을 거둔 우즈에게 견주는 것은 성급해 보이는데도, 현지 미디어는 ‘골프 황제’ 우즈의 스무 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김주형의 실력과 스타성에 주목한다. PGA투어 홈페이지는 ‘골프스타 톰 킴,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에서 타이거 우즈의 젊은 시절을 비추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톰 킴은 김주형이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 ‘토머스 더 트레인(토머스와 친구들)’을 좋아하면서 자신에게 붙인 영어 이름이다. 김주형은 윈덤 챔피언십 1라운드 첫 홀에서 주말골퍼들이 속칭 ‘양파(兩파)’라고 하는 파4홀 쿼드러플 보기로 4타를 잃고도 이후 눈부신 버디 사냥으로 우승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주형이 ‘리틀 타이거’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프레지던츠컵에서의 ‘타이거 세리머니’가 계기가 됐다.
김주형은 김시우와 짝을 이뤄 캔틀레이-잰더 쇼플리와 대결한 포볼(2인 1조로 각자의 공으로 경기하고 더 좋은 스코어를 팀 스코어로 삼는 방식) 경기에서 마지막 홀 버디를 잡아내 극적인 1홀 차 승리를 거두었다. 이 장면은 2022년 프레지던츠컵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버디를 잡고 나서 모자를 내던지고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는 김주형의 영상에 PGA투어 소셜미디어는 ‘스타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PGA투어는 대회 전부터 김주형에게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며 ‘세계연합 팀의 CEO(Chief Energy Officer·최고 활력 책임자)’란 별명을 붙였는데 기대 이상의 만점 활약을 펼쳤다. 김주형은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부터 중국, 호주, 필리핀, 태국을 거치며 잡초처럼 살아남은 ‘골프 노마드(유목민)’다. 김주형은 호주에서 살던 일곱 살 때 호주 마스터스에 출전해 우승한 우즈의 경기를 보고는 “우즈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다. 네 살 때 티칭프로인 아버지를 흉내 내며 골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넉넉하지 않은 환경이어서 열여섯 살에 처음 자신의 맞춤 골프 클럽이 생길 때까지 여기저기서 얻은 클럽을 모아 백을 꾸려 대회에 나갔다. 다섯 나라를 돌며 한국어, 영어, 필리핀 타갈로그어 등 3개 국어를 할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김주형의 골프 준비는 지독하다. 매일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만들고 저녁이면 호텔에서 얼음찜질이나 얼음 목욕을 한다. 부상에서 회복 중인 우즈가 얼음 목욕으로 몸의 부기를 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직접 해보니 훈련 후 회복에 진짜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스캔들과 온갖 부상 등 어떤 환경에서도 최상의 골프를 보여주는 우즈를 동경한다. 김주형은 “남들은 다른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지만, 나는 골프로 스트레스를 푼다”며 “골프를 마음껏 칠 수 있는 곳이 내겐 집과 같다”고 했다.
톡톡 튀는 막내의 등장과 함께 형들도 더 힘을 내고 있다.
2018~2019시즌 PGA투어에 데뷔한 임성재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신인상을 받은 데 이어 올해까지 4년째 최종 30명만 출전하는 플레이오프 최종전인 투어 챔피언십에 나섰다. 임성재는 우승자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21언더파)에게 1타 차로 뒤져, 스코티 셰플러(미국)와 나란히 공동 2위로 마무리하며 페덱스컵 보너스 575만달러(약 82억원)를 받았다. 임성재는 지난 8월 윈덤챔피언십에서 아우 김주형에게 역전패를 당해 2020년 3월 혼다 클래식과 2021년 10월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 우승에 이어 투어 3승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늘 이기고 지는 일이 반복된다”며 “PGA투어 특별 임시회원 신분인 김주형이 우승해 정말 행복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정말 자랑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한국 선수가 우승과 준우승을 나란히 차지한 것도 사상 처음이었다.
톡톡 튀는 막내의 등장
‘맏형’ 이경훈은 올해 5월 AT&T 바이런 넬슨에서 마지막 날 9언더파를 치며 ‘골든 보이’ 조던 스피스(미국)를 1타 차로 누르고 한국 선수 최초로 2년 연속 우승했다. 한국과 일본 투어에서 각각 2승씩 올린 이경훈은 2016년 미국 2부 투어에 진출해 3년 만인 2018~2019시즌 1부 투어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3년간 80번째 도전한 지난해 바이런 넬슨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한 데 이어 올해는 한국 선수로는 처음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우직하게 눈앞의 벽을 하나씩 돌파하며 꾸준히 성장하는 이경훈은 올해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최종전인 투어 챔피언십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김시우는 신성고 2학년 재학 중이던 2012년 12월 역대 최연소(17세5개월)로 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통과했던 ‘골프 신동’이다. 그는 2016년 8월 윈덤챔피언십과 2017년 5월 플레이어스챔피언십, 2021년 1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까지 3승을 올렸다.
올해 PGA투어에 데뷔한 김성현(24)은 한국 선수로는 공식대회에서 유일하게 58타를 기록한 ‘58타의 사나이’이다. 그는 2021년 5월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골프파트너 프로암 토너먼트’ 최종 4라운드에서 이글 2개와 버디 8개를 몰아치며 12언더파 58타를 기록했다. 일본 투어에선 먼저 이시카와 료가 58타를 쳤고, 세계 최고의 무대인 PGA투어에선 짐 퓨릭만 이 기록을 갖고 있다. 세계 주요 투어를 통틀어 5명뿐이다.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인 ‘핑퐁 커플’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아들인 안병훈(31)도 2부 투어를 거쳐 올해 PGA투어에 복귀해 기대를 모은다.
PGA투어에서 활약하는 ‘코리안 브라더스’ 6명 중 이경훈·김시우·임성재·김주형·안병훈 등 5명을 CJ그룹에서 후원한다. 김성현은 신한금융그룹이 후원하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단일 후원사로는 가장 오랜 기간 남자골프대회를 후원해 올해 ‘제38회 신한동해오픈’(총상금 14억원, 우승상금 2억5200만원)을 치렀다. 이 대회는 2019년 대회 국제화를 위해 코리안투어(KPGA), 아시안투어,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세 개 투어 공동 주관으로 진행하고 있다.
여자골프 후원으로 시작한 CJ그룹은 2010년대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 자리를 굳히자 남자골프로 눈을 돌렸다. 꾸준히 선수를 후원하고 2017년부터는 국내 처음으로 PGA 투어 CJ컵을 출범시켜 대회를 열고 있다. 이 대회에는 한국 선수 10여명이 매년 출전해 세계무대 경험을 쌓고 있다. 이런 든든한 후원과 선수들 간 끈끈한 결속력과 경쟁은 ‘코리안 브라더스’의 파워를 급상승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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