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성과 너무 따지는 탓에 선수들, 우울증·중압감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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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미국·일본 무대에서 뛰어본 정상급 선수들과 나눈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프로선수를 존중하는 정도는 일본이 가장 높고 다음은 미국, 한국 순서인 듯했다. 최근 일본 대회에서 만난 마루야마 시게키 선수는 미국 무대 성적만 따지면 최경주나 양용은보다 못하지만 일본에선 '골프의 왕' 대접을 받고 있었다.
골프는 관중이 있는 곳과 선수들이 경기하는 지역이 달랑 로프 한 줄로 갈린다. 로프 가까운 곳에선 선수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당연히 선수들도 팬들 이야기가 들린다.
전체 경기를 매듭짓는 마지막 홀 그린은 대개 많은 팬이 에워싸고 지켜보는 데다 승패가 판가름 나는 곳이라 더욱 정숙을 요구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관중과 선수들 소리가 쉽게 로프를 넘나들기도 한다. 슬럼프에 시달리다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선수에게 얼마 전 "경기가 잘 안될 때 뭐가 가장 힘들던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길지 않은 퍼팅을 실수하면 어김없이 로프 밖에서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와요. 그러잖아도 맥 빠지는데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 들죠. 곧바로 '한국에서 경기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어요. 더 긴장하게 되죠. 한 번 실수는 곧 망신이니까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경기하는 것보다 두세 배 힘들어요."
올해 상반기 한 국내 대회에서 나이 쉰이 가까워진 최경주가 경기 도중 겪은 일이다. 그의 티샷 모습을 보던 한 팬이 "아이고~ 젊은 애들보다 20~30야드는 덜 나가네~"라고 했다. 옆 사람이 한 술 더 떴다. "내가 쳐도 저것보다는 멀리 치겠다."
그렇게 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한국 선수로는 처음 미국 PGA 투어에 진출해 8승을 거둔 레전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모든 한국 팬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성과만 따지는 한국 사회 분위기가 스포츠 관전 문화에도 녹아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올해 서른여덟인 김형성은 "나이가 들수록 일본에서 뛰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꾸준히 성적을 내도 한두 해 우승을 하지 못하면 한국에선 '무슨 일 있는 거야'라고 반응한다. 당연히 했어야 할 우승을 하지 못한 죄인이 되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에선 '롱런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며 대접해 준단다. 그런 칭찬을 자꾸 듣다 보면 더 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한다.
세계 여자 골프를 지배하는 한국 골프 선수들은 '번아웃신드롬(탈진증후군)'으로도 유명하다. 충분히 잘하고 있을 때에도 더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그러다 겨우 20대 중반에 제풀에 스러진다. 골프로는 거의 이루지 못한 게 없는 박인비까지 비슷한 두려움을 토로한다. 골프만 그런 게 아니다. 축구장이나 야구장에서도 자주 들리는 소리가 있다. "밥 먹고 그것만 하는 게 고작~"이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책 '피로 사회'에서 "극단적인 성과(成果) 사회가 사람들을 우울증과 탈진증후군,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로 내몬다"고 했다. 새해 경기장에 가면 혹시 실수가 나오더라도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자. '계속 응원할게요'라는 진심이 전달되면 더 좋은 플레이를 볼 수 있다. 응원과 더 좋은 플레이가 선순환을 이루는 스포츠 세계가 냉혹한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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