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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영이 6월 22일 경기 안산시 더헤븐CC에서 열린 KLPGA투어 더 헤븐 마스터즈 2라운드를 마친 후 은퇴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KLPGA


골퍼 박희영(38)에겐 ‘스윙이 가장 아름다운 선수’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2005년 국내 정상급 선수 50명이 선정한 ‘스윙이 가장 아름다운 선수’에 선정된 덕분이다. 스윙 폼이 최고라는 의미로 ‘폼짱’, 박희영처럼 스윙하면 된다고 해서 ‘스윙 교과서’라는 별칭도 얻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4승,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3승을 거둔 ‘세리 키즈’의 선두 주자 박희영이 6월 22일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20세였던 2007년 미국 진출을 위해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해 단번에 LPGA 진출 꿈을 이루고 미국 무대에서 18년간 활약했다. 


경기도 안산시 더헤븐CC(파72)에서 열린 KLPGA투어 더 헤븐 마스터즈 2라운드를 끝으로 20년간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다. 


박희영은 경기도 안양 대림대학 교수(사회체육학과)인 아버지 박형섭씨의 권유로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7년 골프에 입문했다. KLPGA투어에서 엄마 골퍼로 활약하는 동생 박주영(34)과 자매 골퍼로도 유명하다.


박희영의 은퇴식에는 가족이 참석했다. 박희영은 “은퇴한 선배 언니들이 은퇴 경기 때 많이 울었다고 하기에 나는 안 울어야지 했는데 18번 홀 마치고 나오는데 부모님을 보니까 눈물이 저절로 나더라”라고 말했다. 


2018년 12월 결혼한 박희영은 두 살배기 아들이 있고 오는 11월 둘째를 출산할 예정이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은퇴를 생각하게 됐다. 첫째를 키우면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연습하러 다니고 대회에 출전하는 생활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온 가족이 나를 위해 살았는데 앞으로는 내가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박희영의 골프 인생은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서는 과정에서 그 주역들이 느꼈던 희망과 좌절, 극복에 대한 이야기다


박희영이 2013년 8월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열린 2013 리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경기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박세리의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을 보고 장차 골프 대디가 될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한 여자아이가 많았다.


“나는 그 전해 시작했다. 아버지가 워낙 골프를 좋아해 딸이 골프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박세리 프로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다음 날부터 피부로 느낄 정도로 골프 열기가 뜨거워졌다. 엄청나게 많은 주니어 골퍼가 연습장으로 몰려들었다. 몇 명이연습하던 연습장에 수십 명이 북적댔다.”


세계 최강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나.


“우리는 함께 연습하고, 함께 경기하고, 함께 프로가 되고, 함께 미국과 일본 무대로 진출했다. 우리 세대를 세리 키즈라 부르는 건 참 어울린다. 모두 몰려다니면서 친하게 지냈고 경쟁도 치열했다, 오전 0~1시까지 연습했다. ‘선의의 경쟁’이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과 호주 그리고 지인이 있는 청주 같은 국내 도시에서도 연습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홈스테이를 했다. 내가 KLPGA에서 뛰던 시절엔 1년 대회 수가 11개나 12개였다. 지금은 30개가 넘는다. 당시엔해외 진출이 선택이 아니고 필수였다.” 


지난 5년간 일본, 태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 오면서 한국 여자 골프는 주춤한 모양새다.


“2010년대 한국이 10년간 7번 US여자오픈을 우승하던 당시 한국 출전 선수는 45명 안팎이었다.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한국 선수가 워낙 많고 우승도 자주 하니까 현지에선US코리아오픈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20명 안팎이다. 최근 실력 있는 태국과 일본의 젊은 선수들이 LPGA투어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국내 선수들이 더 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 도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US여자오픈과 LPGA챔피언십 같은 메이저 대회 상금이 1200만달러로 국내 대회 10배 이상이다.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다.”


골퍼로서 기뻤던 순간은.


“당연히 우승할 때였지만 태극기 응원을 받는 모든 순간이 뿌듯했다. US여자오픈이나 에비앙챔피언십 같은 메이저 대회에 나가면 교민들이 태극기를 들고나온다. 나라를 대표해서 뛴다는 자부심에 가슴 뭉클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은.


“5년 전인 2020년 ISPS 한다 빅 오픈 우승이다. 이제 우승은 힘들 것이라고 거의 포기했을 때 찾아온 우승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면 나이를 떠나서 우승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게 한 우승이었다. 2014년부터 손목 부상으로 고생하다 2019년 상금 순위 110위로 떨어졌다. 100위까지 주어지는 새 시즌 풀시드를 받지 못해 12년 만에 퀄리파잉 시리즈에 다시 나섰다. 2위에 올라 다시 LPGA 시드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LPGA투어 진출 당시의 초심을 되새겼다. 마지막 날 엄청나게 바람이 많이 불었다. 유소연, 최혜진과 연장을 치렀는데 4차 연장에서 이겼다.” 


첫 우승도 힘들게 했다.


“2011년 시즌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타이틀홀더스에서 LPGA투어 96번째 경기 만에 첫 우승했다. 무척 감격스러웠다.”


박희영이 2013년 8월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열린 2013 리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경기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실력보다 우승이 많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어릴 때부터 ‘만년 2등’ 소리를 많이 들었다. 골프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따뜻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그 격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엄마 골퍼로 3년 가까이 뛰었는데.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건도 점차 향상되는 것 같다. 동생 (박)주영이도 엄마 골퍼인데 투어를 뛰면서 육아도 가능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지원과 개선이 있었으면 좋겠다.”


직업으로서 프로 골퍼는 어땠나.


“얼마 전 우연히 연세대 동창을 만났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니까, 다른 세계에 사는, 다가가기 어려운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승부의 세계라는 힘든 점도 있었지만 많은 경험과 많은 이를 만날 수 있게 해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골프 선수의 길을 걷고 싶다.”


다시 경기하고 싶은 코스가 있나.


“2013년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 여자오픈이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열렸다. 골프의 고향으로 불리는 유서 깊은 골프장에서 경기한다는 생각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있다. 성적도 좋아서 준우승했다.” 


제2의 인생 설계는.


“지금도 골프장에 가면 설렐 정도로 골프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다. 지도자를 하고 싶다. 어린 선수들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행복하게 골프에 정진하도록 돕고 싶다. 아직 누굴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준비를 잘하고 싶다.” 


미국 골퍼 렉시 톰프슨은 은퇴 선언 이후에도 많은 대회에 나오고 있다.


“나도 기회가 되면 다시 코스에 나서고 싶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듯 은퇴했다고 골프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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