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손녀 응원"
"잔인한 도둑이 매일매일 조금씩 할아버지의 기억을 빼앗는 일은 슬프고 지켜보기 힘들었지만, 병마에 맞서 싸우는 할아버지의 용기와 위엄을 보며 오히려 큰 영감을 받기도 했다."
5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홈페이지에는 여자골프 세계 1위 고진영(25)이 쓴 'MY GRANDFATHER'S DAUGHTER(할아버지의 딸)'이라는 제목의 가슴 뭉클한 글이 올라왔다.
5일 LPGA 홈페이지에 고진영이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 'MY GRANDFATHER'S DAUGHTER(할아버지의 딸)'이 실린 모습. /LPGA 홈페이지 화면 |
알츠하이머병을 앓다 2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비롯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고진영의 할아버지 고익주 옹은 2018년 4월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가정의 달, 가족의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 글은 LPGA 담당자들이 전화로 구술을 받고 고진영의 최종 수정과 확인을 받아 올렸다고 한다.
국내외 골프 대회나 인터뷰에서 고진영이 우는 모습을 몇 차례 본 기억이 있다. 남다른 자신감과 승부욕으로 '멘털 갑(甲)' '강철 멘털' 소리를 듣던 고진영은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곤 했다.
고진영은 이 글에서 "할아버지는 내게 진영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첫 손녀였고, 처음부터 할아버지와 나는 특별했다. 어릴 때 기억 속 할아버지는 마루에서 함께 놀아 주시고, 안아 주시고, 또 나를 웃게 하여 주시는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져 가족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고진영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신인이 된 2014년이었다. 고진영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할아버지는 이전처럼 친절하고 온화하셨지만 그토록 귀여워하던 손녀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내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내가 TV에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께서 나를 기억하셨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TV로 골프 대회를 보시며 내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나를 응원하셨다고 한다. 그 덕분이었는지 나는 KLPGA에서 열 번 우승을 했고, 할아버지는 우승 장면을 TV로 지켜보실 수 있었다"고 했다.
고진영은 2018년 4월 롯데 챔피언십을 위해 하와이에 머무르고 있던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별은 더욱 힘들다"고 당시 슬펐던 마음을 전했다.
고진영은 2018년 LPGA투어 올해의 신인상 소감 연설을 하기 위해 영어를 열심히 배우던 심정도 밝혔다. "항상 나를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내 가장 큰 팬이었던,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진영은 지난 시즌 LPGA 올해의 선수, 상금왕 등 전관왕과 함께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는 "모든 팬이 스코어보드의 숫자나 진열장의 트로피보다 '인간 고진영'을 더 많이 봐주길 바란다"며 "나는 누군가의 친구이자 딸이며 손녀 그리고 골퍼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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